무쇠팬을 쓰면 팔뚝만 굵어질 거라는 건 섣부른 편견이었다. 무쇠팬을 오래 쓰고 보니 근육은 다른 곳에 더 붙어 있었다.
부엌에서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도구는 무쇠팬이다. 오래전 집에 있던 테팔을 모두 없애고 무쇠팬과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들였다. 처음에는 그저 건강을 위한 목적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왜 코팅팬을 쓰지 않고 무쇠팬을 쓰냐고 묻는 다면 무쇠팬을 닮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살림을 잘해보려고 들인 무쇠팬은 나에게 삶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처음 무쇠팬을 쓰는 사람들은 무쇠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무 무겁다느니, 음식이 들러붙는다느니, 씻고 보관하기가 번거롭다느니 하는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도 그랬다.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요리하다가 손목부터 나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처음 산 무쇠팬을 시즈닝 하기 위해 열 번 넘게 오븐에 구워내면서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영화를 보자고 하루 종일 팬을 오븐에 넣었다 뺏다 하는 건지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맛있는 음식 하나 먹자고 요리를 할 때마다 예열을 해야 하고 음식을 하고 난 후에도 씻고 말리고 열을 올려 다시 기름칠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굳이 굳이 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쇠팬은 누가 뭐라 하건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에겐 그만큼의 보상을 준다.
기름칠을 하지 않아도 되고, 예열도 필요 없는 코팅 프라이팬에서는 딱 그만큼의 음식이 만들어진다. 기름 한 방울 없이, 1초의 예열 없이도,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손쉽게 음식이 만들어지는 코팅팬은 신속한 편리함을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딱 그만큼의 맛이 나는 음식이 만들어지고, 쓰다 보면 결국 스크래치가 나기 마련이다. 제 몸에만 스크래치를 내면 다행이지만 코팅팬은 우리 몸과 정신에도 스크래치를 남기기까지 한다.
스크래치가 난 코팅팬은 그 틈으로 유해물질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코팅팬 하나가 정신에까지 스크래치를 준다고 하는 건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닌가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편리함에 길들여질수록 불편한 상황에 더 쉽게 화가 나고 대처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은 편리함에 길들여진 지금 세대를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클릭 하나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인터넷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가 막상 현실 세계에서 몸을 쓰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쉽게 짜증을 내고 난감해한다. 시즈닝을 위해 하루종일 기름을 바르고 굽기를 반복하며 무쇠팬을 완성해 나가는 것과 같은 상황을 난감해 할 수도 있고, 바빠 죽겠는데 5-6분을 예열하기 위해 기다리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초를 다투는 삶 속에선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
코팅팬과 같은 편리함과 신속함에 길들여지면서 우리 정신에는 그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스크래치가 남게 된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키는 깊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수고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무쇠팬을 쓰면서 배우게 되었다. 생각만큼 일이 빨리 풀리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 해도 여유를 가지며 내 정신에 만큼은 스크래치가 나지 않도록 아니, 스크래치가 나도 다시 복원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무쇠팬에서 만들어지는 요리는 테팔에서 맛보던 요리들과는 맛의 차원이 달랐다. 나를 흔들어 놓을 만큼 감동스러운 맛이었다. 화려한 맛이 아니라 깊은 맛이었다. 툭박져도 단단한 맛이었다. 그런 감동을 경험하게 되니 무쇠팬을 쓰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수고는 마냥 즐거운 것이 되었다.
우리말에 '길들인다'라는 표현이 있다. 난 이 말을 참 좋아하는데, 우리가 길들이기를 잘하면 처음 길들이기 전에 어렵게 느껴진 모든 수고로움이 아주 쉬운 것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처음에 무쇠팬을 길들이기 전엔 준비하고 사용하고 보관하는 모든 과정이 어렵게만 느껴졌지만, 길들인 이후에는 그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한 과정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무쇠팬을 즐겁게 사용하는 '길'이 났기 때문이다. 나에게 새로운 '길'을 들였기 때문이다. 길을 놓기가 힘들지 한번 난 길은 쭉쭉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길이 나지 않아 수풀을 헤치며 걸어야 했던 그곳이 이젠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넓은 길로 변해버린다.
무쇠팬을 쓰면서 팔뚝만 굵어지고 단단해진 게 아니었다. 나의 다른 곳이 더 단단해 져 있었다. 감동을 주는 맛을 위해서 시간을 들이고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생각만큼 빠른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해도 다시 천천히 나를 데우고 기름칠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때론 녹이 슬지도 모르지만 녹을 긁어내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아니 원래의 모습보다 더 단단한 모습으로 나를 길들이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다. 내게 없었던 길들이 내 마음에 나기 시작했다. 팔뚝보단 내 마음에 단단한 근육들이 붙어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아들이 독립을 했다.
친구와 살아보겠다며 렌트를 구해 브리즈번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이 독립하는 걸 보는 부모의 마음은 기뻐야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마치 아직 비행을 다 배우지 못한 새끼 새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어미새의 마음이 된 것 같다. '아직 아들이 단단한 마음을 가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하며 노파의 마음으로 걱정을 했다. 하지만 단단한 마음은 내가 대신 만들어줄 수가 없다. 혼자서 밥을 해 먹고, 스스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리고 집세를 내고 혼자 살다 보면 아들의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지겠지. 노파의 마음을 슬며시 내려놓아 본다.
아들이 나갈 때 무쇠팬을 하나 가져가라고 권했지만, 무쇠팬을 쓸 자신이 없다며 가져가지 않았다. 아들은 아직 무쇠팬을 사용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고 했다. 아들이 가져가지 않은 무쇠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제고 아들이 다시 와서 무쇠팬을 가져가길 바란다. 아들의 마음에도 단단한 길이 들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