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는 꽃은 야생화이다. 예쁘게 이름 부르면 들꽃이고 못나게 이름 부르면 잡초꽃이다. 'wild flower'라고 하면 자유로운 영혼의 느낌이 난다. 'wild'가 꽃 앞에 붙으면 사나운 느낌보다는 자유로운 생명력이 전해진다. 누군가 공들여 키운 꽃도 아름답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피는 꽃은 더 아름답다.
땅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호주엔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수풀이 많다. 그 수풀을 헤치고 가면 수풀 속에 피어난 꽃들을 만난다. 산을 타고 내려가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 밀림 같은 수풀에 피어난 꽃들을 만날 때면 보석을 찾은 느낌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bush walking을 하고 있고, 동네 호숫가는 정기적으로 돌고 있으니 버려진 수풀 속에서 그런 꽃들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지구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집을 장식하고 있던 모든 조화들을 정리했다. 절대 지지 않는 꽃이라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어느 순간, 지구를 망가뜨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들을 볼 때면 꽃에 쌓이는 먼지만큼이나 내 마음에 때가 묻는 것 같았다.
조화들을 정리하고 파스타 소스병을 깨끗이 씻어 꽃병을 만들었다. 작은 병들이니 많은 꽃을 꽂지 않아도 돼 부담이 적다. 작은 병들에 먼저 꽂은 꽃은 겨울과 봄의 길목에 피어난 민들레 꽃들이다. 겨울이라 잔디 깎기를 게을리한 탓에 자라난 민들레들이 여기저기 꽃을 피웠다. 민들레는 생명력이 강해 길 곳곳에 한 줌의 흙만 있어도 자라나는 아이다. 집 주변에 자라난 민들레 꽃들을 따다가 병에 담았다. 토끼풀도 함께 담고 마당 곳곳에 피어난 연지 붓꽃(tassel flower)도 함께 병에 담았다. 모두가 잡초로 여겨지는 꽃들이지만 병에 담아 놓고 보니 그 어느 꽃들 못지않게 아름답다.
얼마 전 호숫가를 걸으며 내가 이름 지은 보라 폼폼이 역시 동네 우거진 수풀의 물웅덩이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시꺼먼 물에서도 잘 자라는 아이라 병에 담아 두니 2-3주 동안 예쁜 연보라 꽃으로 집을 화사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수풀을 헤치고 지나갈 때마다 옷에 들러붙어 성가시게 여겨지던 도깨비풀도 꽃을 피운다. 아주 잠깐만 꽃으로 존재하는 그 꽃들을 뒷마당 가장자리에서 따다 병에 옮겼다.
이제 우리 집은 작은 야생화들이 숨 쉬는 생기 있는 집이 되었다. 이 작은 꽃들이 나의 삶에 불어넣는 생기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잔디 깎기 기계에 밀려 존재조차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그 작은 생명들이 모여 발휘하는 힘은 내게 크나큰 것이었다. 길 구석에 그 누구의 따뜻한 눈길조차 받지 못했을 꽃들을 바라보니 그들로부터 사랑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이젠 집을 떠나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에게 꽃 사진들을 보냈다. 아들이 이 공간에서 함께 느끼지 못할 생기들을 사진에라도 담아 전해주고 싶었다.
아들이 예쁘다 한다. 아들도 이 야생화 같은, 들꽃 같은 꽃을 피우길 바라는 마음도 사진에 담았다.
이제껏 아들은 내가 자신에게 심어준 꽃들을 잘 키워왔다. 내가 씨를 뿌리고 가지치기를 하고, 물을 줄 때마다 그 꽃들을 잘 피워왔다. 하지만 이젠 내가 심지 않은, 어느 누구도 심어주지 않은 자신의 꽃을 피울 차례다.
기대와 갈망 속에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땅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피어난 야생화처럼, 누군가의 보호 속에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의 생기를 마시며 피어난 들꽃처럼, 그런 자신의 꽃을 피우길 바란다.
누군가의 눈길을 받지 못해도, 척박한 땅에서 오지 않는 비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피우는 야생화처럼, 그렇게 자신의 꽃을 피우길 바란다.
누군가의 눈길을 바라지 않고,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는, 자신의 피어남에 스스로를 대견해 할 줄 아는 그런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