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아이와 비행기를 타면 생기는 일
땀 반 눈물 반 소금 많이요
비행기를 멀리서 보면 참 멋지다.
하늘에 붕 떠서 왠지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고
저걸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고
창가에서 구름을 내려다보며
역시 하늘에서 마시는 샴페인이 제일 맛있다고 감탄도 하겠지.
어디까지나 홀로 비행기를 탔을 때의 일이다.
아니. 홀로 타더라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었다.
이코노미 좌석은 기차 의자보다 좁았고
내부에서 들리는 비행기 소음은 예상보다 컸고
심심할만하면 기체가 흔들려
주마등처럼 스치는 지나온 인생을 반성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 비행기를 타면 향후 십 년간은 못 탈 것 같은데
이왕 미친 김에 비즈니스석을 타기로 했다.
비즈니스의 좌석은 이코노미보다 넓고 발을 뻗을 수가 있다.
음식도 도시락이 아닌 코스요리가 나온다.
하지만 아이와 같이 탑승할 경우, 아이가 얌전히 잠에 빠진다면
비즈니스석의 장점을 즐길 수 있지만
아이가 당최 잠들지 않고 놀잇감을 찾는다면
좌석의 등급은 크게 상관이 없이 힘들다.
11시간의 비행 중 5시간이라도 아이가 잠을 자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새벽에 출발하여 공항 면세점을 운동장 마냥 세 바퀴나 뛰고
라운지에서도 뒤 꽁무니를 쫒으며 밥을 든든하게 먹였는데
아이도 첫 비행이라 모든 환경이 새롭고 두려웠던 모양이다.
시도 때도 없이 좌석을 이탈하여 방황하는 아이를 붙잡기 위해
나는 의자가 아닌 비행기 카펫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식은 스테이크를 씹었다.
아따. 비니지스 석에서 새참 좀 드시게요 배고파서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얼굴에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이 흘렀다.
아이가 그릇을 떨어뜨릴 까 무서워서 다 비우지 못한 접시를 치워야 했다.
그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친절한 승무원께서 나에게 다가와
"아까 식사 다 못 하신 것 같은데. 배고프지 않으세요? 지금 뭐라도 다시 드시겠어요?"
"아뇨. 배 하나도 안고파요. 진짜 안고파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까 그 샴페인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식은땀을 하도 빼니 갈증이 났다. 이왕이면 물보다 알코올을 섭취하는 게
이 상황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작고 소중해 보이는 유리 와인잔에 샴페인을 담아 주셨다.
미안하지만 나는 밥 대신 그거 한 병을 통째로 먹을 수 없을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다.
식사 시간이 끝나자 비행기 내부가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좌석을 한껏 제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잠에 들 수 있다면 어디서 안정제라도 구해서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는 Booba라는 만화에서 본 주인공처럼 비행기를 열심히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사과하는 로봇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또 죄송합니다. 계속 죄송합니다.
그냥 모든 게 죄송합니다. 아이랑 같이 타서 죄송합니다.
내 존재 자체가 죄송합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단지 엄마를 따라왔는데 첫 경험이고
좁은 공간에 장 시간 머문 적이 없어 매우 당황스럽고 답답한 모양입니다.
겁도 없이 저 천방지축을 데리고 장거리 비행을 하게 되어 매우 송구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복도를 돌아다니며 사죄의 의미로 삼보일배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잠이 든 승객들이 깨기 전에
아이를 들쳐 안고 갤리 옆 빈 공간에 주저앉았다.
굳게 닫힌 항공기 문이 보였다.
여긴 지금 중국의 어느 대륙 위쯤 이려나 드넓은 바다 위쯤 이려나
어딘지 모르겠지만 일단 낙하산을 펴고 아이와 내리면
여기보단 나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이미 비행기의 구조는 다 파악했으니
다른 곳에 가자고 울며불며 문을 열려고 끙끙댔다.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래. 너만 문을 열고 싶은 게 아니란다. 나도 문을 열고 싶구나.
지하철처럼 5분이 지나면 다음 내리실 역은 어디라며 뚱땅대는 음악이 나왔으면 참으로 기쁘겠다.
아니면 여기가 한 박물관에 전시된 비행기 모형인데
관람시간이 끝났으니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얼마나 기쁠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너랑 헤어지든 비행기랑 헤어지든
낙하산이 없다면 빈 몸이라도 뛰어내려 착륙을 시도하고 싶구나..
오체가 성하게 착륙은 못 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나는 아직도 중국의 어딘가 밖에 오지 않았다. 중국은 왜 이렇게 넓은 거니.
기내 어두운 조명이 무색하게 더 어두워지는 나의 잿빛 얼굴을 보며
한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머. 저희 아들이랑 나이가 같네요. 호호. 많이 힘드시겠어요.
저도 저희 애랑은 제주도까지가 한계예요. 호호호."
이것이 전문가가 전하는 위로와 충고인 셈이다.
정 비행기를 탈거라면 애 데리고 제주도나 갈 것이지
뭐더러 이런 장거리 비행기를 타서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아주 이 비행기까지 아사리판을 만드느냐.
이미 탔으니 이번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는 제주도나 가도록 해. 멍청한 어미야.
아이는 완충된 레이싱 장난감처럼 비행기 복도를 버선발로 달리고
나는 퀭한 눈으로 꿈을 꾼다.
비행기가 회항하는 꿈을 꾼다.
뒷자리에 앉은 외국인이 아이를 보며 감탄하더니 엄지를 들어 올리며 한 마디 건넸다.
"Super Kid!!"
고... 고맙습니다. 근데 칭찬이신 거.. 죠? 이것은 칭찬일까 욕일까
나는 덜 떨어진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얼굴에선 여전히 땀반 눈물반 소금 많이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