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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경 Nov 13. 2024

정말 가만히 있으면 될까요?

모르는 마음.zip #2


  "가마이쓰!"


  아버지의 명령. 말을 겨우 이해하던 아기 때부터 귀에 익은 말이다. 딸내미가 서른 중반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신다. 8살 초등학교 숙제로 가면을 만들다 헤맬 때, 아버지는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가져가며 가만히 있으라 했다. 미끄덩한 목 넘김이 싫어 마다하는 입으로 생굴을 밀어 넣을 때도, 가족여행을 가다 어머니와 의견차가 생겼을 때도, 가족 구성원이 본인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할 때도. 얼음땡 주문처럼 이 말을 외쳤다.


  "가마이쓰!"


  거친 목소리. 매듭 같은 말. 뚜껑이 봉인된 상자에 갇힌 용수철 인형처럼 무섭고 갑갑했다. 누르면 튀어 오르고 싶으니까.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딸의 관계지만, 어린 나의 마음에는 누르는 아버지와 주눅 든 딸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일흔을 넘긴 아버지. 그사이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남편 H. 그 덕분에 수십 년간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던 아버지의 가만있으란 말이 유머로 승화되는 경험을 했다. 처음이었다. 급격한 말의 온도 변화를 느낀 것은. 그는 손님과 가족, 그 사이의 시선으로 함께 했다. 재해석되고 덧그려지는 가족의 그림이 조금씩 쌓였다. 낯설었다. 새로운 바람이 굳은 벽 사이로 불었다.




  재작년 겨울, H와 함께 아버지 산장에서 불멍을 하게 되었다. 산에 집 짓고 사신지 십 년이 훌쩍 지났는데, 그 집에서 불을 쬔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부지런히 땔감거리를 모아 이미 까맣게 그을린 검은 드럼통에 넣고 불을 지폈다. 일을 도우려 나무를 만지는 H에게 "어허, 가마이쓰!" 브레이크 거는 말이 날아왔다. 돌연 굳어버린 나와 달리, H는 태연하게 물었다.


  "아버님, 저... 정말 가만히 있으면 될까요?" 그는 미소를 머금고 힘차게 차렷 하는 시늉을 했다.


  "허허, 아니지. 그건 아니지. 가만있어봐." 아버지는 멈칫하더니 잠시 생각을 하시는 듯했다.


  "하하, 네, 저 가만히 있겠습니다." H와 아버지의 이상하고 평화로운 대화에 한껏 경직된 어깨가 내려갔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가만히 있으란 말 이면을 들춰볼 수 있었다. 한 번도 생각지 않고 싫게만 여겼던, 삼키기 어려운 말이었는데.  


  "가마이쓰... 가만히 있어... 그래, 잠깐만 내가 생각하는 중이니, 잠시 기다려 보란 것. 그런 의미인거지. 허허." 아버지도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해석해 본 것처럼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의 명령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었을까? 내가 알던 아버지 사이로 모르는 세계가 비집고 들어선다. 그동안 내 안의 상처만 들춰보느라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여전히 8살 어린아이 편에 서고 싶었나 보다. 그럴싸한 모습으로 가면을 만들어 딸내미 기 세워주고 싶었을 아버지 마음, 골고루 먹이고 가족을 잘 이끌고 싶지만 다만 방법이 서툴렀을, 나는 결코 모를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무게. 그제야 나름의 풍경을 그려본다. 온도가 변한다.


  녹지 않을 것 같던 눈이 녹는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마법 같이.


  지난 추석 가족이 모여 밥 먹는 자리에서 금기시되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다. "아버지 자주 하시는 말 있잖아. 가마이쓰! 근데 H가 '저, 진짜 가만히 있을까요?' 되묻는 거 있지? 놀랐다니까." 오빠는 한술 더 뜬다. "아버지 연배의 경상도 아저씨들이 자주 하는 말이지. 뭐, 영어로 하면 'wait a minute.'과 같은 뜻이겠네." 그렇네. 아버지도 웃으신다. 지금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말투로 "가마이쓰~ 가마이쓰 봐~" 하신다.


  이렇게 보니 인생은 살아볼 만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란 게 정말 맞나 싶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도 말이 되고. 앞으로도 나를 얽매는 상황이 오면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멀찍이 물러나 보아야지. 말이 마음을 가리거든 마음을 물어야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틈새는 문이 되었으려나. 케케묵은 관계에서도 새로이 발견할 보석이 여전히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가까이 발등이나 코앞이 아닌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해방일지 한 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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