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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경 Dec 02. 2024

각자의 취향이 우리의 문화로  

15. 기대되는 방향으로 걷기

  디자인을 전공한 짝은 미적 감각이 빼어나고 섬세한 사람이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2019년, 그의 집에 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오래된 건물의 8평 남짓 옥탑방이었는데, 문을 여는 순간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인도의 정취가 묻어나는 검붉은 양탄자와 검은 식탁이 방 가운데를 묵직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짙은 회색 커튼으로 가려진 옷장에는 디자인만 다른 검은색 옷들이 빼곡히 정돈되어 걸려있었다. 조도 낮은 조명이 방 곳곳의 오브제를 밝히며 전체적인 간접등 역할을 해주었다. 작은 방에 시선 머물 곳이 가득했다. 골목의 숨겨진 재즈바나 누군가의 아지트에 몰래 들어온 느낌이랄까.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누구의 공간인지 아는 사람은 알만큼 짙은 그의 취향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만나온 6년 간, 짝 덕분에 아름다운 곳에 많이 다녔다. 미술관, 공연, 재즈바, 잘 설계된 숙소, 가구 편집샵, 공원, 영화, 여행.... 함께 부지런히 보고 듣고 느끼며,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이해했다. 한 때, 취향을 식물 가꾸듯 다듬어 키워가는 사람에게서 윤이 난다고 느꼈다. 좋아하는 것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눈은 반짝인다. 취향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 스스로 부여하는 '나다움'이라서 자신감에도 기여하는 걸까? 취향을 뾰족하게 다듬으면 나도 조금은 선명하게 윤이 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취향이 확실한 사람을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취향이란 다양한 세상 경험이 켜켜이 쌓여 드러나는 한 사람의 생활양식이자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곁에서 본 바, 견고해 보였던 짝의 취향도 고여있지 않고 흐른다. 풍성해지거나 정교해지거나. 이런 생각의 변화 덕에 집순이의 엉덩이가 조금 가벼워졌다. 흥미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경험을 많이 하고 싶기에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의 방향이 생활에 윤이 나게 한다.


  함께 쌓은 미감과 서로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었기에 집짓기 과정이 순탄할 수 있었다. 2023년 겨울, 안전을 위해 공사를 쉬어가는 시기에 우리는 인테리어 구상으로 분주했다. 건축 설계가 끝나고 골조 공사와 콘크리트 양생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도면으로만 보던 건물의 공간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텅 빈 공간을 걸으며 앞으로 펼쳐질 생활을 상상했다. 이곳은 동선이 이렇게 되니 가구를 이렇게 두고, 저 공간은 여백이 많으면 좋겠고, 미리 공수해 둔 선반은 딱 저기 들어가면 되겠다며. 말하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서너 걸음의 활동 반경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에 충분한 원룸 생활에서 열 걸음을 걸어도 먼 공간에서 생활을 그리자니 실감이 안 날 수밖에.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괜히 심장이 간지러웠다. 텅 빈 거실 한편에 버려진 박스를 깔고 앉아, 창 한가득 그림처럼 펼쳐진 설산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우리 모습이 떠오른다.  


2023.1월 중순 / 홍천






  그 해 겨울, 발리의 고재가구와 오브제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 하여 대전에 다녀왔다.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구하려면 전국 곳곳으로 발품을 팔아야 한다. 우리보다는 언니 오빠 뻘인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시는 곳이었는데, 편안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 풍겼다. 2층 높이로 뻥 뚫린 층고와 수직으로 층층이 쌓인 고재 가구들이 멋스러웠다. 사방에 감탄을 자아내는 물건들이 많았지만 우리 둘 마음에 드는 가구는 딱 다섯 손가락에 꼽았다. 검은색의 무게감과 세련됨을 무척 좋아하는 짝과 나무가 풍기는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내가 합심하여, 블랙우드 고재가구를 몇 개 골랐다. 야외에 둘 가로로 긴 벤치와 거실 소파 옆에 둘 둥근 협탁, 욕실 욕조 옆에 둘 작은 스툴.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쏙 드는 가구들이다. 공들여 고른 제품이 오래 마음에 머물 때, 안목에 대한 자신감이 붙는다. 스스로에게 귀 기울여 후회 없는 선택을 한 것도 기특하고 말이다.


  원하던 가구를 구매한 것도 기뻤지만, 공간과 가구를 닮은 두 분과의 대화가 인상 깊었다. 서울에서 바쁘게 커리어를 쌓다가 돌연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 발리에서 쉼과 함께 찾아온 좋은 감정들, 좋아하는 것을 좇아 나아가다 보니 지금에 와있다는 이야기와 발리의 아름다운 경험들에 관해 들었다. 행복 구슬을 꿰는 이야기였다. 이런 우연의 순간은 내가 어디로 나아가고 싶은지, 어떻게 살길 원하는지 더 선명하게 만든다. 반짝반짝 살아있음을 느꼈던 순간이다.


  대전에서 올라오는 길, 짝에게 인상 깊었던 부분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나의 특기다.


  "마음에 꼭 드는 고재가구들도 좋았지만, 실은 더 좋았던 건.... 어떤 계기로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원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가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들을 따라 흐르듯 하게 된 일이라는 인생스토리가 인상. 깊었어.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당연히 힘든 구석이 있고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지만, 원하면 자발적으로 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고. '힘들어도 해내야지!'가 아니라 '그래, 쉬었다 가자.'라고 말해주는 짝이 곁에 있다는 이야기에 널 보게 되더라. 살다 보면 언제 쉼표를 찍을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그 순간을 알아차리려면 '왜'를 잃지 말아야겠지? 브레이크를 밟거나 우회할 순간을 아는 것! 그래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것!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것! 인생에 우연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 이런저런 생각에 무지 설레고 좋았어. 너는?"


  나와 상반된 특기로 가끔 콩트를 연출하는, 짝의 특기는 한 줄 요약이다.


  "맞아. 자유에 대한 코어를 갖고 계신 분들 같아. 참 좋았다 오늘!"


  지금의 우리와  닮은 구석이 많아서, 흐르는 결이 비슷해서 만남 자체가 응원처럼 여겨졌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사랑 행복 자유. 그래서 종종 상기한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행복한가. 자유로운가. 아니라면 코어를 놓치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이다. 무언가는 욕심일 때도 있다. 못 멈추고 달리게 하는 욕심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혜안과 덜어낼 수 있는 용기가 내 안에 있는지 더듬어 보다 짝의 말에 웃고 말았다.


  "발리 가서 웃통 벗고 오토바지 타자! 이왕이면 조용한 시골로 돌아다니자."

  "웃통은 꼭 벗어야 해?"

  "응, 그게 포인트야!"


  웃음과 함께, 사랑 행복 자유 3종 세트가 시원하게 머리를 훑었다. 햇살에 그을릴 흙빛 피부가 벌써 설렌다. 발리에서 우리의 오감은 어떤 춤을 추고, 그 경험은 어떤 모습으로 쌓이게 될까. 함께 산다는 건 문화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짝과 나, 우리의 가족 문화가 하루하루 만들어지고 있다. 든든하고 튼튼한 콘크리트 집, 무아경이 둥지가 되어주니 훨훨 날자. 내년에는 홍천집 갈무리 잘해두고 꼭 발리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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