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활발한 사람이었다. 평일에는 5일 중 3일 이상 저녁 약속이 있었고, 주말에도 이틀 중 하루는 꼭 약속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약속을 좀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고, 맨 정신에 두세 시간씩 수다를 떨어도 부족함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그 두려움이 컸다. 내 생활이 무너지면 어쩌지, 나는 회사에서도 일을 잘하고 싶고, 집안일을 신경 쓰느라 회사 일은 뒷전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회사 사람들과 가끔 저녁도 하면서 일을 해야, 여러모로 일을 진행하기가 매끄러울 텐데. 친구들과 너무 오래 못 보면 멀어질 텐데, 근황을 알아야 할 이야기가 더 많은데, 그게 내 즐거움인데.
그래서 남편에게 일찌감치 말해 뒀다. 아주 오랜 시간 고심해서 내린 결론이라는 듯, 나도 많이 양보한 것이니 이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거라는 듯,
내가 일주일에 세 번은 일찍 올게, 오빠가 일주일에 두 번은 일찍 와. 나도 야근을 해야 할 수 있고, 사람들하고 저녁도 먹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엄마한테 저녁시간까지 기댈 순 없어, 그러니까 협조해 주면 좋겠어.
남편은 별 반응 없이 ‘알았어’라고 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커다란 딜을 성사시킨 사람마냥 기분이 좋았다. 아니, 불안감을 조금 덜었다(그는 아주 현명하게 대처했다. 어차피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의 일이니 미리 다투기 싫었을 수도 있고, 육아와 사회생활사이의 균형이 무너질까 봐 걱정이 컸던 내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그냥 대충 알았다고 했을 수도 있지만.).
아기가 태어나고 복직을 했다. 친정엄마는 회사 일에나 신경 쓰라며 아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남편도 최대한 일찍 와보겠다고 했다. 모두들 협조를 해줬다.
하지만 아기는 나와 합의를 한 적이 없다.
아기는 집에서 나를 기다렸다. 100일이 조금 지나서 회사에 복직을 했으니, 그 시기의 아기가 나를 기다렸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내 느낌은 그랬다. 아이, 왜 이제 왔어. 종일 같이 있더니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이제 와 찾아보니, 아기들이 엄마 얼굴을 알아보는 시기는 보통 3~6개월이라고 한다. 내 느낌이 완전 엉터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6,7월쯤 되자 아기는 친정엄마와 함께 집 앞 놀이터에서 나를 기다렸다. 해가 길어진 여름이라 아직 밝을 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아기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밝게 웃었다. 그때부터는 분명히 느꼈다. 왔다, 야호. 엄마가 왔다.
야호, 엄마가 왔다
나는 단 하루도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았다. 남편이 일찍 오건 아니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놀이터에서 해가 질 때까지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기는 '힘 없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차피 유모차에 앉아만 있으니 '힘 있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애초에 없었는데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서도 그 애는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것이고, 그런 아기를 생각하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아기는 돌봄을 받는 객체가 아니었다. 그 애를 돌볼 순서를 정하고 시간을 나눈다고 해도, 나와 아기가함께 하는 시간은 돌봄과는 아예 다른 것이었다.
사실 아이가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고 할머니나 아빠와 즐겁게 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기가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한들 뭐 어떠냐, 그렇다고 엄마들이 본인의 저녁시간을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다림은 아기부터 어른까지 모두에게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냥 내가 별나게 그랬을 뿐이다. 아기가 종일 나를 기다렸을 것만 같아서 저녁에는 바로 집으로 가고 싶었다. 누구를 만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아기 생각만 났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라는 소설이 있다. 기욤 뮈소가 2007년에 쓴 책인데, 국내에서는 영화화가 되었기에 더 유명한 책이다. 주인공 엘리엇은 외과의사로 캄보디아에 구호활동을 하러 갔다가 한 노인으로부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열 개의 알약을 얻는다. 엘리엇은 30년 전으로 돌아가 옛 연인이었던 일리나를 살리려고 한다(그녀는 30년 전 사고로 사망했고 그는 그녀를 평생 잊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 그녀를 살리고 그녀와 함께 하면, 그의 딸 앤지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일리나를 살리고 그녀와 헤어진다.
나는 미혼이던 시절 그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니, 일리나를 30년 동안이나 그리워했다며,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을 먹고 과거로 돌아갔다며, 어차피 아기는 그녀와 결혼해서 다시 낳으면 되는 것 아닌가?
세상에,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고처럼 우연히 만난 동료 의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앤지보다는, 자기가 평생 그리워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나? 어차피 둘 다 자기 아이가 아닌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거니까 앤지를 잃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면 뭐, 그 정도로 일리나가 그리웠던 것은 아닌가 봐?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알았다(그제야 알았다).아이는 ‘내가낳은 아기’나 ‘내 유전자를 받은 아기’ 따위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고유의 이름을 가진 누군가였다. 내가 낳는 다른 아이가 그 애를 대체할 수 없고, 내가 그 아이와 가지는 우리 둘 만의 시간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아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이야기를 해줬다. 엄마는 그랬어, 그 책을 읽고는, 다른 아기를 다시 낳으면 되지 주인공이 대체 왜 그랬을까? 했지. 근데 네가 태어나고 나서야 알았어, 아니더라. 우리 소중한 꼬꼬를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엄마는 아예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았을 거야. 다시 만날 수 없는 가능성이 쬐금이라도 있단 걸 아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는 일 따위 바로 포기했을 거야. 우리 꼬꼬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