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와 딸이 꼭 가고 싶은 1순위는 베네치아였다. 14년 전 유럽 여행에서는 베네치아 일정이 반나절밖에 되지 않아 관광 명소 앞에서 사진 찍고, 젤라토 사 먹고, 미로 같은 길 헤매다가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기차역으로 돌아와야 했었다. 짧은 일정에 아쉬웠지만 그 와중에도 베네치아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었다. 우리는 지난 여행에서 못 했던 것을 다 해보기로 하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집이 예쁜 부라노섬에 가보기, 지난번에 시간이 없어 못 탔던 곤돌라 타기 등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당일 오후에 곤돌라를 타 보기로 결정하고 유럽 여행 카페를 통해 같이 탈 동행을 구했다. 곤돌라 이용 가격은 30분 탑승에 80유로 (약 104,000원), 6명 정원이기 때문에 1명이 타던 6명이 타던지 금액은 같아서 대부분 동행을 구해 비용을 절감하곤 했다. 마침 우리가 도착하는 날 같이 타겠다고 하는 일행이 2명 있어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선착장에서 대기중인 곤돌라
드디어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베네치아까지 2시간 6분을달려서 오후 3시 산타루치아 역으로 기차가 들어섰다. 다시 베네치아에 오게 되다니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캐리어를 끌고 산타루치아역을 빠져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산타루치아 역을 나오면 보이는 풍경
"안돼!" "비 오면 곤돌라 타기 힘들 텐데..." 걱정이 들었다. 날씨 운이 좋아서 이번 여행이 수월한 편이었는데 하필 베네치아에서 비가 오다니... 빨리 비가 그치기를 바라면서 예약한 한인 민박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점점 더 빗줄기가 강해져서 캐리어에 넣어둔 우산까지 꺼내 써야 했다.
우리가 예약한 디에도 민박은 역에서 1km 정도 거리에 있고 구글맵상으로 1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우산을 쓰고 캐리어를 끌고 작은 운하들 사이에 있는 다리를 4개나 건너가려니 1km가 아니라 10km는 되는 것만 같았다.
비에 젖은 베네치아 거리
마침내 민박에 도착했을 때는 지쳐버렸고 비가 너무 와서 곤돌라도 탈 수 없었다. 다음날로 미룰까 했더니 동행하기로 했던 분들은 내일 일찍 베네치아를 떠난다고 했다. 새로운 동행을 구해야 할지 의논을 하다 보니 우리는 서로를 배려해서 곤돌라를 타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지난번에 곤돌라를 타보지 못해 딸이 타고 싶은 줄 알고 있었고 딸내미 역시 엄마가 타고 싶어 해서 같이 타려고 했던 거였다. 심지어 딸은 무서워서 그리 타고 싶지 않은데도 말이다. 둘은 마주 보고 웃음이 터졌고 비싸기만 한 곤돌라는 안 타기로 결정했다. 낭만 따윈... 던져 버리기로 했다.
비수기였는데도 베네치아의 숙박비는 비쌌다. 그래서 본섬으로 들어오기 전 메스트레 역 근처에서 숙박을 하고 기차로 관광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는 본섬에서 묵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도미토리룸을 같이 쓰고 싶지 않아서 트윈룸이 있고 관광지에서 가까운 숙소를 찾다 보니 평점이 좋은 디에도 민박에 묵기로 했다. 호스트는 친절했고 여행한 지 10일이 넘어가 그리웠던 한식이 조식으로 제공되는 등 좋은 점이 많았지만 트윈룸은 좀 불편했다. 좁은 건물 꼭대기에 다락방 같은 곳이었는데 천정이 낮아 엎드리다시피 지내야 했고 비가 와서 습도도 높아서 그리 좋은 컨디션이 아니었다. 다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가게 된다면 조금 비싸도 호텔에 숙박할 생각이다.
디에도 민박 트윈룸
오후 일정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베네치아의 첫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비 오는 거리를 헤치고 튀김 맛집으로 소문난 프리토 인 (Frito Inn)을 찾아갔다. 역에서 민박집 가는 도중에 있는데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곳은 아니고 테이크 아웃해서 가져가서 먹어야 했다. 한국 여행객이 많아서 그런지 메뉴판도 한글로 적혀 있었다.
맥주와 새우튀김을 사들고 리알토 다리 야경을 보러 갔다. 비가 오니 거리도 우중충하게 느껴지고 우산 때문에 힘들고 사진도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 비 오는 베네치아 싫다며 가벼운 짜증을 내는 딸을 젤라토 사주며 달랬고 내일은 비가 개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프리토 인 새우튀김
리알토 다리에서 보는 야경
그 와중에도 리알토 다리 위에는 야경을 보기 위해 모인 여행객들이 제법 있었다. 사람들과 비 때문에 좀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에 젖은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 베네치아에 와 있다는 두근거림이 우리를 알 수 없는 감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내일은 빛나는 햇빛 아래의 베네치아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베네치아의 아침
전날 여정에 지친 딸이 곤히 자는 걸 보며 조심스레 민박을 나선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흐리고 거리는 온통 이슬이 내린 듯 젖어 있었다. 새벽안개에 싸여 좀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아침이었다.
천천히 산책을 하듯 지난밤에 갔었던 리알토 다리로 갔다. 비가 많이 와서 물기를 머금은 운하와 인적이 없는 다리의 모습은옛날 필름으로 찍은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잘 지어진영화 세트장을 혼자 걷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내친김에 마르코 광장까지 걸어 가볼까...
아니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딸을 깨우고 아침을 먹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해야지. 오늘의 계획은 오전에 산 마르코 광장과 베네치아 시내를 둘러보고 점심 먹고 부라노섬으로 갔다가 돌아와 일몰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