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을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영화 '맘마미아'의 아만다 사이프러스가 주연을 맡았고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베로나에서 촬영한 영화이다. 베로나로 여행을 간 주인공이 '줄리엣의 집'에서 발견한 편지의 인물을 찾아 사연 속의 첫사랑을 찾아주다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도 찾게 된다는 로맨스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배경이 되는 베로나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이 많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베네치아 일정 중 베로나로 다녀오기로 한 것은 아마 이 영화 장면이 인상 깊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베로나 카드 (Verona Card)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가량 걸려서 베로나 역에 도착했다. 먼저 인포메이션 센터로 가서 베로나 카드를 구입해야 한다. 17군데 관광지 입장권 및 교통권이 포함된 시티 통합권이다. 24시간, 48시간 등 종류는 많지만 우리는 당일치기 여행이라 24시간권(1인 18유로)을 구입했다. 우리가 가보고 싶은 몇 군데만 가더라도 입장권을 구입하는 것보다 더 싸고 버스도 무제한 탈 수 있기 때문에 베로나에서는 꼭 이 카드를 구입하는 게 유리한다. 특히 아레나 같은 경우 베로나 카드 전용 입구가 있어 줄을 서지 않고 먼저 입장할 수 있다.
베로나 카드로 24시간동안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아레나(Arena)
베로나의 대표적인 쇼핑 거리인 마찌니 거리와 가까운 브라 광장 (Piazza Bra)에 위치한 아레나는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이었고 매년 여름이면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브라 광장에 위치한 아레나 입장료는 10유로였다.
베로나 역에서 브라 광장까지 2킬로미터, 걸어서 올 수도 있지만 당일치기 여행이라 시간도 아껴야 하고 베로나 카드도 있으니 버스를 타고 갔다. 우리는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옆을 지나 베로나 카드 전용 입구로 입장을 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관람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페라 시즌이 아니지만 그래도 공연 같은 걸 하는지 중앙에는 좌석과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저곳에서 검투사들의 경기가 벌어졌을 것이다. 밖에서 볼 때는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규모가 작아 보였는데 제법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2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니 여름밤 관람석에서 오페라를 보게 된다면 여간 장관이 아닐 것 같다. 여름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베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레나'와 '줄리엣의 집' 이니까 아레나를 관람한 후 줄리엣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줄리엣의 집 정원은 무료로 개방이 되고 집 안으로 입장하려면 입장료가 6유로라고 하였다. 베로나 카드가 있으니까 우리는 내부도 관람하기로 하고 길을 찾아갔다. 그런데... 없다. 구글맵을 보면서 아무리 길을 찾아봐도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왜 사진이나 후기에서 봤던 정원으로 가는 입구가 없는 걸까?
갑자기 딸이 철창으로 꼭 닫힌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다. 근데 수리한다고 적혀있어!" 우리가 갔을 때 줄리엣의 집은 닫혀 있었고 수리 중이었다. 결국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람베르티의 탑 (Torre dei Lamberti)
람베르티 가문이 세운 탑이고 베로나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한다. 입장료는 8유로, 베로나 카드가 있으면 무료이지만 탑까지 368계단이라 1유로의 사용료를 내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라갔다.
람베르티의 탑
람베르티 탑 엘리베이터 티켓
가장 높은 곳이라 그런지 과연 도시 전체를 360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심지어 멀리 산 피에트로 성도 아래로 보인다. 이전의 여행에서는 왜 입장료를 내가며 전망대에 오르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도시마다 전망대에 올라 도심을 보았다. 딸이 좋아해서 같이 오르기도 하지만 도심의 모습을 위에서 보는 것은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언뜻 보면 유럽 도시가 다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다시 보면 나름 도시마다 자기 나름의 개성이 있다. 베로나의 구시가지는 그리 넓지 않고 아기자기하면서 정감이 넘친다. 도시의 모습을 보다 보니 밀라노 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인데 당일치기 말고 1박이라도 할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람베르티의 탑에서 내려와 베로나의 거리를 걸어본다. 노천 마켓이 열려있는 에르베 광장에서 마그넷과 컵 등 기념품도 사고 아치로 된 통로를 지나 시뇨리 광장으로 가보기도 했다.
한가로이 거리를 걸어보고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예쁜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도 하는 그런 여행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자유시간 조금 주면 잠시 둘러보고 다른 일행들 기다릴까 급히 약속 장소로 가서 또다시 다른 관광지 찍고 넘어가는 그런 건 우리가 좋아하는 여행의 방식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계획은 갖고 시작하지만 딸과 나는 대부분 여유로우면서도 즉흥적인 여행을 한다. 누구나 각자의 좋아하는 여행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친구 또는 모녀간의 여행에서 많이 싸우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로의 여행 방식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여행 메이트인 딸과 나의 여행 방식이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에트라 다리 (Ponte Pietra)
1세기경 지어진 피에트라 다리는 베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고 베로나 시내를 휘감듯이 둘러싸고 흐르는 아디제 강을 가로질러 세워져 있다. 강가를 따라 조성된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 장소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작년에 방송된 '비긴 어게인'이라는 음악 예능에서 베로나의 피에트라 다리에서 즉흥버스킹 하는 장면이 나왔다. 가봤던 곳이라 더 반갑기도 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기도 했다. 여름 오페라 시즌 말고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여행지인 줄 알았는데 방송에서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우리가 갔던 때가 정말 비수기였나 보다.
피에트라 다리에서 보는 산 피에트로 성
피에트라 다리에서 바라보는 아디제 강과 강 주위에 있는 건물들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산 피에트로 성으로 올라가 볼 차례다.
산 피에트로 성 (Castel San Pietro)
산 피에트로 성으로 올라가면 베로나 도심을 휘돌아 감싸며 흐르는 아디제 강과 피에트라 다리의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다. 걸어 올라가도 되지만 피에트라 다리를 건너 옆쪽으로 가서 푸니쿨라를 이용해 올라가기로 한다.
푸니쿨라 승강장 왕복 2유로
오르막을 힘들어하는 딸을 위한 배려이자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맑았지만 구름이 좀 있어서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라 멀리까지 바라보이는 풍경이 정말 멋졌다. 대부분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광장에서 도심을 향해 전망을 보기 위해 올라간다. 우리도 역시 성 밖의 광장에서 베로나의 구시가지 쪽 전망을 감상했다.
강과 함께 보이는 베로나의 풍경을 보며 행복해 보이는 딸의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우리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순간, 모든 장면이 다 너무나 애틋한 것 같다. 지금도둘이서 함께 했던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있다.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와 피에트라 다리로 갔을 때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낮에 보는 아디제 강도 아름다웠지만 어둠에 잠들기 전의 강의 모습은 더욱 몽환적으로 보였다. 가로등 불이 하나씩켜지면서 불빛에 비친 강물에는 또 하나의 도시가 신비롭게 생겨 났다. 아직까지도 베로나에 대한 감상을 물어보면 딸은 항상 해 질 녘 피에트라 다리에서 본 풍경이 제일 예뻤다고 말을 하곤 한다.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좀 남아 있어 강변의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산 피에트로 성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어두운 보통의 카페 같은 공간이 있지만 안쪽의 문을 나서면 마법처럼 테라스가 나타난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으면 아디제 강과 반대편 산 피에트로 성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안주도 없이 맥주 두 잔 시켜 놓고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이 그림처럼 나지막한 산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얼마 전 딸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때 베로나에서 갔던 카페 너무 좋지 않았어?" "아아... 엄마가 나랑 같이 가서는 계속 아빠랑 왔으면 좋겠다고 했던 곳?" 시크하게 대답했다. 앗! 내가 그랬던가?... 미안.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많은 도시들 중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는 많았지만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도시를 말해보라면 단연 베로나를 꼽고 싶다. 물론 딸은 나와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정감이 가서 당일치기로 짧게 다녀오기에는 아까운 너무나 사랑스러운 도시로 기억에 남아있다. 어디를 여행하던지 미리 조사해서 여기는 꼭 가야지 하는 장소가 있는데 우리도 베로나에서 제일 기대했던 곳이 바로 줄리엣의 집이었다. 그래서 수리로 인해 닫혀있는 걸 보고는 만약 베로나에 다시 와야 한다면 그 이유는 줄리엣의 집을 보지 못해서가 아닐까 했었다. 아니면 여름이 아니라서 보지 못했던 아레나의 오페라 공연이 그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를 꼬박 보내며 내가 느낀 베로나는 줄리엣의 집을 보지 않더라도 다시 와보고 싶은 도시이다. 아니 단지 다시 와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 함께 며칠이고 머물면서 평화롭고 고요히 강변을 걸어보고 그때 갔었던 테라스 바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은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