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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Aug 18. 2022

택도 없는 소리

양쌤의 another story 21

  우다다다다다다다 자판을 잡아먹을 듯 때려서 어쩌구 저쩌구 다섯 줄 정도를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세 번 정도 읽어 보다가 절레절레 실망의 백스페이스(backspace). 다  다  다  다 다 다 다 다 에잇!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제목만 남았다. 손은 든 것도 없이 무거운 머리를 받치는 데에나 쓰는 건가. 두 손은 얌전히 머리를 받치고 허연 화면만 쳐다보았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잉크로 빽빽하게 글이 쓰여 있는데, 어제저녁 속에도 없는 감사의 인사를 날린 탓에 일시적으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 없는 깊은 한숨. 그때!    


  저 구석에서 쉬지 않고 폭풍 타이핑을 하는 저 처자는 대체 어느 동네 무얼 하는 처자인고? 저 소리, 저 소리! 아주 오고무를 추어대는구나. 마음속엔 500페이지 소설이 들어앉았건만 도무지 글발이 받쳐주질 않으니. 글은 포토샵도 되지 않고 화장발 조명발도 먹히지 않는데. 아… 내 글의 민낯은 서클 렌즈 뺀 눈동자요, 아이라인 없는 눈꺼풀이요, 그리다 만 눈썹이로구나.

  여보시오. 그대 가슴 속에 들어있는 북 하나만 빌려주면 안 되겠소? 아니 되면 냉큼 일어서서 사라지시오. 그대는 내 마음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구려. 쑥대머리~~~    

 

  세 줄 써 놓고 열 번 읽고 비싼 카페인만 쭉 쭉쭉 쭉쭉 들어간다. 새벽에 비몽사몽 떠올랐던 상큼 발랄 글귀들은 그냥 잠꼬대 같은 것이었나보다. 오늘은 글렀다. 일단 철수. 어느 배우가 슬럼프는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오는 것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런 것일까.    

  그렇게 카페에서 반나절을 보낸 며칠 뒤,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선물 받은 와인 세트들을 열어 보니 화이트 와인만 3병 남았다. 달달구리 와인을 좋아하는 나는 비싼 맛 와인을 뱅쇼로 만들어 먹어버리는 아주 웃기는 짓을 하고 화이트 와인만 남겨 놓았다. 화이트 와인 한번 마셔볼까? 크리스탈 잔에 와인을 따랐다. 꿀렁꿀렁꾸울렁.

오호! 생각보다 괜찮은데? 시원했으면 더 좋았겠어. 한 모금 두 모금. 그러다가 와인병 라벨에 꽂혀서 바코드 숫자보다도 작은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는데… 왔어, 왔어. 노트북, 노트북~!    

  다다다다다다다 소설이 쓰고 싶었다. 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아도 심장이 쫄깃해지고 닭살이 오돌도돌 솟는 스릴러를. 중학교 때 나는 스릴러소설에 폭 빠져 살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릴러소설에 대한 사랑은 권태기도 없다. 이불 뒤집어쓰고 땀 뻘뻘 흘리며 읽던 이야기들은 언감생심 흉내도 못 내고, 정교한 짜임새와 매력적인 서사도 보장할 수 없지만 어쨌든 쓰고 싶었다. 와인 한 잔 더! 음침하고 스산한 기운 가득한 글을 써 내려갔다. 음하하하. 눈동자엔 열기가 가득하고 허리는 찌릿찌릿 발바닥이 간지러운 것이, 알콜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방정맞은 춤을 추어대고 있었다.


  다음날 설레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더블 클릭, 짜잔!

  이런... 경솔한 글쓰기 하고는. 와인 한두 잔으로 글이 술술 써지더라니 하하하핫! 택도 없는 소리지. 차마 버릴 수는 없는 이 글을 언젠가 다시 소생시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넣어두는 걸로.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아니고 글 쓰는 게 제일 쉬웠어요." 나한테 그런 때가 오긴 할까? 그런 때가 오지 않아도 할 수 없고 오지 않아도 괜찮다. 제발 글 쓰라고 등 떠미는 사람도 없고 게으르기까지 하지만 언젠 뭐 뾰족한 수가 있어서 글을 썼나. 그냥 쓰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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