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고요하고 느리게 흘러간 2년의 세월을 몇장의 페이지에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빈 페이지를 보니 막막함, 아니 먹먹함이 느껴진다.
가정보육의 시작은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였으니, 지금은 아이가 일곱 살이다.
갑자기 전업맘으로서 낯설지만 그래도 익숙한 서울에서 우리 삶의 두 번째 챕터가 펼쳐졌다. 서울에서 대학생으로 자취를 했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서울살이를 하려니 두려운 것이 참 많았다. 나 혼자는 어디든 괜찮았는데. 낡은 것을 싹 다 갈아엎고 새로 지어진 세종시에서 나름 윤택한 시간을 보냈던지라, 서울에서 어디에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틈만 나면 나는 서울 지도를 들여다보며 남편의 회사와 가깝고, 너무 낡지 않은 집을 현실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찾기 시작했다.
서울 아파트를 찾으면서 그제야 왜 비혼주의가 청년 세대에 일반화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비슷한 조건을 찾으려면 세네 배는 더 웃돈을 주어야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파트값이 치솟고 있던 2020년이었다.
결국 부부는 원활한 두 번째 챕터를 맞이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 세네 배를 더 주고 세종시와 비슷한 뉴타운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 들어보는 동네였지만, 남편 회사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었고 40분이 걸리니 서울에서 나름 직주근접인 셈이었다.
직장에 복귀 예정이었던 나는 아이가 10개월 되던 무렵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다. 세종시에서는 아이가 많아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일찍 등록해야 한다는 꿀팁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면역이 약했던 아이는 자주 아파와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갔다 오곤 했지만, 그래도 일찍부터 어린이집에 다녔으니 어디서든 잘 적응할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출산율이 낮다는 말이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서울에서도 어린이집 보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특히나 전업맘에 외동아이를 보내려니 희망하는 국공립어린이집은 들어갈 길이 없었다.
4월이 되자, 티오가 났다고 한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간 곳은 약간 낡은 시설에, 엄마로서의 직감적으로 확 끌리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 없이 낯선 곳에 잠깐이라도 숨통이 트일까 해서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 적응 시간을 보냈다.
'우리 아이는 분명 적응을 잘 하는 아이인데?'
그러나 아이는 낯선 환경에 발도 떼지 않고, 내 품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코로나로 인해 찜찜한 마음에 다시 가정보육을 하기로 했다. 가을이 되던 무렵, 어린이집에서 이제 그만 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아이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지만, 며칠 뒤 어린이집에서 할로윈 준비에 무서운 마스크를 쓴 선생님을 보고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긴급콜을 받았다. 당시에는 나도 당황스러워,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어린이집을 그만두었지만, 낮잠 시간에 억지로 누워 있다가 겁에 질렸을 아이를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게 첫 번째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남은 긴긴 겨울은 집에서 보냈다. 봄이 오면 새로운 어린이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 시절 왜 나는 그렇게 아이와 떨어지려고 했을까. 회사에 있었다면 그토록 원했던 시간이었을 텐데 말이다.
왜 아이가 크고 나서야, 그리고 잠든 뒤에야 그 시간들이 그리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