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잘 양육해야 하는 목적은, 잘 독립시키기 위함이다."
결혼하고 줄곧 부모님 댁 5분 거리에서 살았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도 부모님과 가깝게 있다 보니 꽤 오랜 기간 부모님과의 물리적 울타리와 심리적 거리에서 독립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양육할 때에는 친정 옆으로 이사 간다고 하지 않나. 여전히 도움의 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사 왔다. 물리적으로 서로가 멀어지고 나니, 진정한 독립이 시작된 것 같았다.
2020년 초, 거리적으로 익숙한 곳에서 멀리 떠나왔고, 그 시기가 코로나의 시작과 겹쳤다.
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왔고, 남편이 회사를 간 후 아이와 느긋하게 맞이하는 아침이 꿀처럼 달콤했다. 육아휴직과는 또 다른 홀가분함이었는데, 출근 전후의 전쟁 같은 삶, 갑자기 아픈 아이를 어떻게 돌볼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야근이나 회식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삶, 즉 시간을 되찾은 삶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현장에서는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나치다가, 아이가 자고 나면, 그리고 좀 더 자라면 그 찰나의 순간을 애타게 그리워하게 된다. 퇴사 후 달콤했던 꿀 같은 시간은 한 달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망각하게 되었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아이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남편이 귀가하는 늦은 시간까지 어떻게 시간을 채워야 할지 막막함에 부딪혔다.
저출산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린이집 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아이와 외부 활동을 하기가 선뜻 불편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이와 집순이처럼 보내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인 집순이로서의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