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후기
수레바퀴 아래서 후기
데미안과 싯다르타의 핵심은 주인공의 성장에 있다. 그들은 성장한다.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다르다. 주인공 “한스”는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그것뿐인가? “한스”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방황만 한다. 그에게 편안함을 주는 집 같은 것은 없다.
소설은 “한스”가 받는 어른들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가 공부하면서 느꼈던 우월감은 어른들의 시선에 기초한다. 그것은 “한스”의 시선이 아니다. “한스”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자연을 보고, 영적인 것에 이끌린다. 그의 주변에는 그런 그를 있는 대로 바라봐줄 어른이 없다.
그렇다고 “한스” 주변에 좋은 어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스”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관자다. 죽어가는 영혼을 관망할 뿐이다. 하긴 그들 또한 세속적인 어른일 뿐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세속적인 삶의 안위를 걱정한다.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야 한다. 어른들이 “한스”에게 원하는 것, “한스”의 성공은, 그가 수레바퀴에서 더 나은 자리에 위치하게 하는 것이다. 이 수레바퀴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과 현실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좁은 시야, 도덕적 깊이의 결여, 그것들이 한 사람을 파국으로 이끈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을 죽여왔다. 말로, 시선으로, 죽인다. 그리고 합리화한다. 너의 선택이었다고, 네가 나약해서라고,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해왔다. “한스”가 죽어도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도 도덕적인 나머지 이런 일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소설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만족하라고 하겠지만, 그 말을 하는 당사자부터가 이미 다른 “한스”를 만들고 있다. 더 나은 미래, 다른 현실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속적 기준에 개인을 맞추려 든다. 그것이 개인을 죽음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