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후기
부주의한 사랑 후기
오래간만에 좋은 소설을 만났다. “무엇(주제)”에서 시작하지 않고, “어떻게(표현 방식)”에서 시작하는 소설. 난 그런 소설이 좋다. 주제란 얼마나 낡고 헤진 것인가. 주제란 대개 시시하다. 스타일이 주제를 구원한다. 그리고 스타일만이 주제를 파괴한다. 난 그 순간을 사랑한다. 결국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기억이다. 꿈과 환상도 결국 기억의 재조합일 뿐이다. 주인공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아니 기억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어머니 대에 있었던 일, 자신의 출생 이야기, 자기 친가족의 이야기. 그건 “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 때까지의 이야기. 그러니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이야기다.
“나”는 자신이 가진 정보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게 꿈의 형태로, 환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과거를 본다. 그리고 그 과거는 미래에서 다시 되풀이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사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네, 중국집, 강가의 숲, 지진 같은 것들.
“나”는 “연연”이라는 사촌의 이름을 쓰고, 어머니처럼 부주의한 사랑을 하며, 자매들이 살았던 곳과 비슷한 집에서 산다. 다만 시골과 다르게 도시에서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골과 도시가 다른 이유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 기억은 쫓아온다.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그 이야기를 살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이야기를 사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만들거나.
소설은 파편적이다. 그것이 기억의 작동방식 아닌가? 기억은 순차적이지도, 플롯이 있지도 않다. 떠오를 뿐이다. 강원도에 가면 강원도의 기억이 떠오르고, 엄마를 만나면 엄마의 기억이 떠오른다. “연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연연”의 기억이 떠오르고. “나”는 모든 순간에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소설은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나”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는 남자는, “나”와는 다른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다. 억울하고, 정신병에 걸린 아버지, 어딘가에 살아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의 아버지. “나”는 쓰지 못하는 이야기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소설이 맴도는 곳, 그곳이 “부주의한 사랑”이다. 소설의 시작에서 시간은 많이 지났지만, “나”는 어머니, 연연, 아버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나지 않는 건가?) 그러니 “나”의 뿌리가 되는 어머니, 아버지, 연연을 “나”는 반복한다. 나쁜 피는 없다. 나쁜 기억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