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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는 “멋진 나”들의 세상에 돌 던지기

단상들

by 밸런스

믿음에는 극단적인 면이 있다. 우리가 빨강이라고 하는 것을 누군가 파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래, 그게 너의 파랑이구나. 그렇구나.” 할까?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게 빨강이라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러 할 것이다. 그게 옳다고 믿으니까 말이다.


무신론자, 무교인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그런 면이 없다고 여긴다. 자신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그런 미신들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양성을 받아드리는 “멋진 나”에 취한다. 그들은“빠졌다”, “세뇌” 같은 표현을 쓰며, 종교를 믿거나 믿었던 사람들을 “멋진 나”와는 다른 저급한 인간으로 만든다.


“멋진 나”들의 세상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 그들은 힘이 없고, 나약하다.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이다. 뿌리 없이 날아다니면서 이게 전부 맞는 거라고 말한다. 그건 다양성과는 상관없다. 그냥 생각이 없는 거다. 하지만 그들은 그게 다양성이라고 믿는다.


믿음이 다른 두 사람의 세계관은 충돌한다.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우는 거다. 목사가 된 자식이 조상님께 절을 안 한다? 기다리면 된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부모는 늙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가 힘에 부치면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기독교 자식에 대한 존중이나 다양성 수용과는 무관하다.)


사람들이 좋게 좋게 넘어가는 거, 그건 대부분 귀찮아서다. 싸우기 싫은 거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경험한 인간은 귀찮더라도 싸운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옳음과 그름이 있다. 그들은 그름을 참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극단적이다, 고집이 세다고 하지만,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품어야 하는 인간은 “멋진 나”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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