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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해라는 불가능성

예술을 보는 이유

by 밸런스

예술에는 인간에 대한 낙관이 있다. 난 예술에서 낙관을 배운다. 그것은 인류,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단 한 사람에 대한 단 하나의 믿음, 그것이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다. 당신은 이해한다. 당신을 이해한다. 이 말을 진심으로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예술이 하는 일이 바로 그렇게 말하기다.

온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이해는 착각의 산물이다. 이해는 오만함의 증거다. 난 이런 문장을 계속 쓸 수 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생산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온전한 이해를 찾아 헤맨다. 희망은 낙관할 수 있는 구체성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추상성에 기초한다. 나에게 이해란 희망이다.


불가능하고, 불가능하고, 불가능하다. 계속 확인한다. 예술가들은 이해의 불가능을 확인한다. 그것이 예술가를 비관으로 빠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곳에서 끝없이 피워 오르는 희망을 발견한다. 나는 그 희망을 단 한 인간에 대한 낙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수천 명의 몰이해 뒤에 오는 단 하나의 희미한 이해.


이미지, 그래 이미지다. 이해는 구체적인 앎이 아니라 이미지다. 신을 보았기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을 경험했고, 느꼈기에 믿는다. 이미지란 보는 게 아니다.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곳에 무엇인가 있음을 안다. 말할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살아있음을 믿는 이유를, 그토록 선명하게 자기 자신을 느끼는 이유를.


예술은 이미지다. 예술가는 이미지를 만든다. 예술가도, 비평가도, 대중도 그것을 정복할 수는 없다. 누구도 신을 정복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존재하게는 할 수 있다. 이해에 기초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 당신이라는 이미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의 예술 작품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예술이다. 예술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도 그런, 단 사람, 나를 존재하게 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리라는 낙관이다. 예술은 실패하지 않는다. 포기가 있을 뿐이다. 나는 포기를 모르는, 당신의 단 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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