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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자 시인의 시대,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시 리뷰

by 밸런스

시인은 가을을 계절로 보지 않는다. 가을은 외부에서 오는 적군이다. 적군 앞에서, 시인은 속수무책이다. 도망칠 수도 없다. “한 쪽 다리”에 찾아온 “마비”는 시인의 도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죽음만이 그에게 남은 길이다. 좋았던 날도 없으면서 해는 무심히 져간다.


무엇도 할 수 없다. 살 수 없다. 살 수 없는 인간 앞에서 모든 것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무엇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누가 알겠는가. 나 또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그런 풍경이다.

습기를 잃은 모든 사물은 생명력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형태마저 지워버린다. 형태를 남기면서 습기만 가져간다는 건 삶의 의지만을 빼앗는 행위다. 의지 없는 것이 살아가는 세상. 시인은 허무주의자인가?

그렇다. 시인은 허무주의자다. 한때는 유명했을 가수의 노래를 들어도 신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옛날 일이고,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수 없이 부르고, 그 부르는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그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수신인”을 이미 잃었고,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시인은 그것을 안다. 그러니 그는 허무주의자가 되었겠지.

허무주의자에게 기억이란 오물이다. 몸에서 배출된 찌꺼기. 그것이 온몸에 묻어있다.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자기 육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을 증오한다. 시인은 마지막에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유, 안정, 치유와는 거리가 멀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 하는 말, 난 그의 말이 체념처럼 들린다. 지금까지 왔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미래를 꿈꾸지만, 생명만을 잃은 것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바다는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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