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원한 젊음, 윤동주 <병원>

윤동주 <병원> 해석

by 밸런스

병원/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우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에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나는 어떤 문장을 쓰는 일의 어려움을 믿는다. 하나의 문장은 현재의 나에서 출발하여 미래의 나에게로 간다. 미래의 나는 이 시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상을 말하는 사람은 강하다. 강하게 믿는다. 오지 않은 것이, 내게 올 것이리라고. 믿지 않는다면 쓸 수 없다. 믿기에 쓴다.


윤동주 시인의 <병원>을 읽는다. 이 시인은 대체 무엇을 믿는 것일까? 이 시에 대해, 누군가는 사회 제도 비판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식민지 지식인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모든 해석에는 일리가 있다. 그것 모두 이 시에 있다. 나는 이 시를, 영원히 낫지 않을 “젊은이의 병”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려 한다.

“나”는 병에 걸려있다. 이것은 “젊은이의 병”이다. 그래서 “늙은 의사”는 이 병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늙었기 때문에. 나이는 시간이 흐르기에 먹는 것이다. 하지만 늙음은 시간이 아니라 사회의 때가 묻는 것, 녹스는 것이다. 그들, 늙은이들은 과거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고, 젊음을 떠올릴 수 없으니 늙은이는 젊은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젊은이만이 “젊은이의 병”에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나”는 “젊은 여자”에게 계속 시선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젊은 여자”의 아픔도 알 수 없다. “나”는 “나”의 고통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 “여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거의 없다.

“나”는 “젊은 여자”의 자리에 누워보며,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본다. “여자”의 병과 “나”의 병은 이어져 있다. 두 사람의 병 모두 “젊은이의 병”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기 힘들어 보인다. 병을 낫게 해줄 의사는 이미 늙었고, 아직도 나는 나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예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미래가 “젊은 여자”와 같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그 여자”와 “나”를 혼동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젊은이의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도 지금과 같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는 젊은 여자는 금잔화를 가슴에 꽂고 병실로 돌아간다. 병실로 돌아가는 건 병이 낫지 않기 때문이고, 금잔화를 꽂는 건 살려는 의지다. 병든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윤동주 시인의 삶이고, 미래지 않았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