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반달/박준 해석
인천 반달/박준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 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너의 최선이 나의 최선과 같지 않았다. 사람은 말을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누구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낼 수 없다. 우리 또한 상대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에 맞는 단 하나의 말은, 인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최선은 너의 최선이 아니다.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는 “당신”이, “나”에게 바란 것은,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것이리라는 말이나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 번 놀러가보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봉틀”을 다루어 본적도, “양말 앞코의 재봉일”을 해본 적 없는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헛소리, 하지만 헛소리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 상황에 늘 최선을 다한다. “나”의 말 또한 헛소리로 치부하지는 말자. 그건 “나”가 “당신”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 전달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분명 전달되었을 것이다. 전달되었기에 “당신”은 헤어짐을 선택했다.
최선이 다르다는 것, 그건 헤어짐의 이유가 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리라는 말이니까.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해가 지속성을 가질 수는 없다. 한번, 두 번 반복되면 더 이상 이해하고 싶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게 너의 최선이었구나, 말하고 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진정 최선이었는지 계속 물을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은 없었는지, 계속 연락을 이을 방법은 없었는지 말이다. “당신”은 편지하지 않았지만, 양말을 보내왔다. 그 양말을 만들면서도, “당신”의 손은 달처럼 부었을 것이다. 그게 “당신”의 최선. 최선의 마음에, 최선을 보내오는 것. 그게 다정 아닐까?
“나”의 “눈에/반달이 자주” 비추기 시작한 것은, “나”에게 준 양말을 만들었을 “당신”의 손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반달은 “반은 희고/반은 밝았다.” 반달은 완전하지 않다. 부족하다. 반은 희고, 밝다. 나머지 반은 밤이다. 검고, 어둡다. “나”의 반달은 “반은 희고/ 반은 밝다.” 반쪽으로 채우는 것은, 나이고, 나머지 절반은 당신이 보내온 마음으로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