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희망
아들에게/이성복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遲鈍(지둔)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入場(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球根(구근)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다 빈 말이라도 따뜻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 말이 따뜻한 時代(시대)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時代(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時代(시대)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故鄕(고향)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故鄕(고향) 대신 물이 흐르고 故鄕(고향)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性器(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性器(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꿈꾸는 이상이 높은 자는 절망한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상을 하늘에서 땅으로 끄집어 내린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현실은 대체로 따분하고, 지루하고, 지겹다. 반복되고, 반복돼서 고통마저 잊어버린 곳, 그곳이 현실이다. 시란 무엇일까? 우물에서 하늘보기(황현산). 우물 속 개구리가 하늘을 보며 꾸는 꿈, 그게 시다. 시는 현실을 잊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버티기. 그 너머를 보기다.
이성복의 <아들에게>는 시의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화자는 "폭력이 없는 나라"에 다가간다. 하지만 시, 어디에도 그가 그곳에 도달했다는 말이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오면 입장하겠다고 말하지만, 시, 어디에도 그 사람이 왔고, 입장했다는 말이 없다. 화자는 도착하지도, 입장하지도 못한다. 그가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장소는 현실,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에도 입장하지도, 도달하지도 못하지만, 그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빈 말이 따뜻한 시대",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 이것들은, 그가 기다리던 것이 아니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쩌면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에게 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에게 고통을 준다. 이곳이 "폭력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폭력이 있는 나라"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있는 나라"는 그의 이상과는 반대되는 곳이다. 그가 진정으로 이상을 추구한다면, 그는 "폭력이 없을 수 있는 나라"로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 땅을 떠나지 않는다. 새로운 장소를 찾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서 조금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단단히 땅에 발을 지탱하고 있다. 이 땅에 새로운 천국이 올 것이리라고, 그는 믿는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에 머문다.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를 두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머무는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기에 고향을 버린 사람이다. 그가 시민으로 속한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그가 시민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은, 그의 이상 세계다. 그러니 그는 더더욱이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 세계에 있는 사람이 현실에서 버티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우리는 이 고통을 인생의 변곡점마다 느낀다. 그러나 금방 잊어버리고, 적응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않기로 한다).
그는 찔리는 사람이다. 수없이 많은 탄생을 보았지만, 그것으로 폭력을 막을 수 없음을 본 사람. (우리는 누구나 性器(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그는 자신도 "폭력이 있는 나라"에 있음을 시인한다. 그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폭력을 아는 사람. (性器(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그래서 한 번 더 깊이 찔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기다림과 믿음이다. 언젠가 올 순간(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에 존재하게 될 희망을 주는 것이다. 희망은 믿음이 현실이 될 가능성의 제시가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의 개시다. 그러니 희망하는 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일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지만,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버지가 쓴 글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인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아들의 글을 보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부계로(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내려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지막 견해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는 기다림의 사제들 사이로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 시인에게서 시인에게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니까.
질문
1. 화자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폭력이 없는 나라. 늦게 오는 사람은 무엇을 말 하는 것일까요?)
2. 화자에게 시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도 화자의 시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까요?
3. 왜 화자는 아들에게 이런 글을 써준 것일까요?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