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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Oct 05. 2023

뛰는데 필요한 것은 패기, 안 뛰는데 필요한 것은 용기

마라톤 훈련 11주 차

마라톤 훈련 11주 차
1.6마일 리커버리 런
부상 그리고 휴식
폭우로 취소된 18마일 대회

10주 차 막바지에 비가 많이 와서 달리기를 못하고, 애타는 마음과 언더트레이닝으로 근질거리는(말 그대로 근질거린다) 몸을 겨우겨우 달래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에 15마일을 뛴 것까지는 좋았다.


평소 신는 신발이 아닌 우천용 트레일화를 신어서인지, 아니면 비 오는 날에 뛰어서인지, 발목이며 무릎이 조금 시큰거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15마일이나 뛰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 주....


큰 비가 온 후 뉴욕은 날씨가 엄청나게 추워졌다. 싱글렛은커녕 반팔도 추워서 긴팔셔츠를 입어야 할 정도였다. 장거리를 뛰었으니 이틀정도 쉬고, 리커버리를 해야지 하며 집을 나선 그날은 날씨가 꽤 쌀쌀해서 긴바지 조거팬츠에 긴팔 셔츠를 입고 얇은 윈드브레이커까지 입었다.




누구나 선호하는 날씨가 제각각이겠지만은, "더운 날"과 "추운 날" 중에서 양자택을 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러너가 추운 날을 선택할 것이다. 어차피 뛰면 더워지니까, 추운 날이 훨씬 수월하다. 한국처럼 뼈를 바르고 살을 에일만큼 추운 기후가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다. 한겨울에도 아침 달리기를 하는 시간에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말이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더운 날에 달리기를 하면 물을 마셔야 하니 경우에 따라 선 물통도 들고 다녀야 하고 전해질 캔디도 먹어야 하고 이래저래 귀찮아서 싫다. 추운 날에는 달리기로 더워진 몸에 시원한 공기가 닿는 느낌이 좋다. 대신 옷을 여러 겹 입어야 하고, 한겨울엔 장갑이나 모자 등 챙겨야 하는 게 많은 게 성가시긴 하다.


뭐 어쨌거나 그날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서늘한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1마일쯤 뛰고 웜업이 되면서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릴 때 시원한 바람에 닿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거기까지는.



1마일을 넘으니 오른쪽 골반에 기분 나쁜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그 느낌은 통증으로 변해갔다. 정확히는 골반에 넓적다리뼈가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하...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도 지난 3년간 달리기를 하면서 보통의 러너들처럼 발목이며 무릎이며 여기저기가 아파봤고, 장경인대인지 햄스트링인지 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부위가 아플 때마다 새로운 인대의 이름까지 배웠다.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에 '조금 아픈 것은 뛰다 보면 낫는다'는 생각으로 그냥 뛰었고, 실제로 많이 그랬다. 어디가 좀 아프더라도 한걸음 뗄 때마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픈 게 아니라면 뛰다 보면 낫는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그건 물론 내가 굉장히 빠르게 뛰는 러너도 아니고, 한 번에 5Km 정도씩만 뛰는 마일드한 러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다리의 여~~~~ 러가지 부분의 통증을 두루두루 겪어온 어느 날.

아픈 것이다. 골반이!



문제는 이제 나는 느리게 뛰는 러너도 아니고, 앞으로 남은 일정은 18마일 대회, 하프마라톤 대회, 20마일 트레이닝, 10마일 트레이닝이 일주일 간격으로 꽉 차 있다. 물론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풀 마라톤이다.

뛰다 보면 낫겠지 하며 뛰기엔 너무 과격한 일정이다. 만약 그러다가 낫기는커녕 그야말로 악 소리 나게 아파진다면...?



트레이닝을 쉬면 불안하지.
그런데 트레이닝을 일주일 쉬는 게 낫겠어?
아니면 부상으로 2달을 쉬는 게 낫겠어??


나는 지난봄 브루클린 하프마라톤 때도 부상으로 대회를 뛰네 마네 했던 전적이 있다. ㅜㅜ

5보로 시리즈 완주를 위해 꼭 뛰어야만 하는 대회라서 기록에 욕심내지 않고 완주만을 목표로 결국 뛰긴 뛰었지만, 정말로 두 달 동안 무릎에 테이프를 붙이고 다녔다.


하프마라톤이니 그나마 어찌어찌 완주는 했지만, 한 달 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풀 마라톤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장거리 트레이닝 중 어느 하나라도 건너뛸 수 있는 게 없다. 백번 양보해서 하나는 건너뛴다고 해도 두 개 이상 건너뛰었다간 마라톤 당일 완주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착실히 모든 트레이닝 메뉴를 다 끝낸 러너도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는 게 뉴욕시티 마라톤이다. 코스가 험하기 때문이다.



불안했다.

너무 불안했다.

참가권을 따기 위해 1년 동안 9번의 대회를 뛰고, 자원봉사까지 했다. (뉴욕시티 마라톤 9+1 프로그램)

발목과 무릎에 가는 부담을 줄여 부상 없이 트레이닝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체중감량을 7kg이나 했다. 해도 안 뜬 새벽 6시 30분에 모여 그룹 트레이닝을 하고, 숨이 끊어질 만큼 힘들게 템포런을 하고, 주말마다 장거리 훈련으로 거리를 쌓았다. 쉽지 않은 마라톤 트레이닝을 벌써 10주 동안 하면서, 사람을 만나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때론 가려가며 해왔다. 그런데 지금 부상의 기미가 보이고, 지금까지의 10주보다 열 배는 더 중요한 앞으로의 6주 훈련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남은 6주의 훈련은 뉴욕마라톤 출발선으로 가는 돌다리의 한 칸 한 칸이다. 어느 한 칸도 건너뛰고는 강을 건너갈 수 없는, 중요한 한걸음 한걸음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다리가 아프다.




마라톤을 뛰는데 필요한 것은 패기
훈련을 쉬는데 필요한 것은 용기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훈련을 빼먹으면 완주가 불투명해진다.

훈련을 강행하면 부상을 당해 아예 대회에 못 갈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패기보다는 용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완주가 불투명해지더라도, 다치지 않은 다리로 출발선에 설 수 있다면 걸어서라도 피니쉬라인까지 갈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초심을 되돌아봤다.

마라톤 훈련을 시작하고 속도와 거리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나에겐 언감생심이었던 4시간 이내의 기록으로 완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까지 생겼다. 하지만 작년 11월 Abbot dash to the finish line 5k 대회에서 마지막 9번째 피니쉬라인을 통과하고 2023 뉴욕시티 마라톤 참가권을 확보하던 그날, 내가 생각했던 것이 과연 sub4였는가?



나는 이 뉴욕시티 피니쉬라인에 반드시 돌아온다. 1년 후에 완전히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 이 피니쉬라인을 다시 밟는다.



그것뿐이었다.

4시간대 기록에 비하면 간지라는 것이 폭발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되는 3시간대 기록이 좋기야 하겠지만은,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빨랐고,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애초에 마라톤이라는 세계에서 3시간대 기록이니 4시간대 기록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뉴욕시티 마라톤은 해마다 5만 명이 뛰고, 딱 1명의 우승자를 제외한 4만 9천999명은 패배자다. 하지만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달라서, 나의 유일한 상대는 나 자신뿐이며, 결승선을 통과한 모든 러너는 스스로를 이긴 승자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훈련을 쉬는 "용기"를 선택했다. 토요일에 예정되어 있었던 18마일 대회도, 지금 다리 상태로 뛰었다간 최소 한 달은 달리기는커녕 걷지도 못하겠다 싶어 과감히 '안 가기로'결심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번의 대회를 뛰어봤지만 신청했다가 가지 않은 대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로서는 정말 큰 결단이었다.




훈련을 쉬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힘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된 훈련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스트라바를 보면 나와 늘 같이 훈련하던 친구들이 18마일, 20마일을 뛴다. 나만 뒤처졌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딱히 넘어지거나 발을 접질린 기억도 없는데 왜 아픈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이미 10주간 훈련을 해온 몸이라 갑자기 줄어든 훈련량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다. 소화가 안되고 식욕이 전혀 없었다. 잠도 안 온다. 그래도 지금 훈련을 쉬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이라는 마음으로 버텼다.




그리고...




범람 직전의 고와누스 운하.

주말이 다가오자 다시 한번 폭우가 찾아왔다.

이번엔 지난주보다 더 심하게 퍼붓기 시작하더니, 지대가 낮은 브루클린은 하천이 범람해 교통이 마비되고 지하철역이 침수되어 운행이 중단되는 등 예삿일이 아닌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뉴욕 로드러너스(NYRR)가 토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18마일 대회를 취소했다.


!!!



이번주는 뛰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처럼!

대회가 취소되었고, 덕분에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덜었다.

스트라바를 보니 훈련그룹 친구들은 빗속에서도 18마일을 뛰었다... 그런 걸 볼 때면 다시 불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곤 했지만,

모두가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모두가 같은 일정과 강도로 훈련을 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다음 주는 나아지기를.

다치지 않고 출발선에 설 수 있기를.

끝까지 무사히 완주할 수 있기를....




평생 운동치 몸치로 살아온 여자의

인생 첫 마라톤 도전기 [인생에서 한 번은 뉴욕마라톤을 뛰자] 매거진에서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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