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담 May 25. 2023

브루클린 하프 마라톤 2023

D-167 겸손함을 되찾자!

브루클린 하프 마라톤은 NYC 하프와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규모가 큰 하프마라톤 대회다. 



브루클린에서 출발해 맨하탄 센트럴 파크까지 가는 NYC하프는 왠지 모르게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가 어울리는, 소위말해 각이 잡힌 대회다. 베드타운에서 산업단지를 거쳐 이제는 세계적 브랜드가 된 "브루클린"에서 출발해 센트럴 파크 72번가, 즉 11월에 열리는 뉴욕시티 마라톤의 피니쉬라인 바로 그 지점까지 가는, 말 그대로 뉴욕 마라톤의 축소판이다. 풀코스와 하프 마라톤을 동시에 진행하는 대회도 있지만 뉴욕시티 마라톤은 오직 풀코스만 진행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3월에 열리는 NYC하프가 바로 11월 뉴욕 마라톤의 하프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브루클린 하프 마라톤은 반바지에 알로하셔츠가 어울릴법한 대회다. NYC하프처럼 각이 잡힌 대회가 아니라 흥겹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노는 휴양지 느낌이 난다. 골인지점이 뉴욕의 유서 깊은 유원지인 코니아일랜드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코스 전반에 걸쳐 푸른 녹지와 아담한 타운하우스 사이를 달려 바다까지 가는 풍경이 이어진다. 

3월에 열리는 NYC하프는 소위 마라톤 시즌이라고 하는 추운 날씨에, 5월에 열리는 브루클린 하프는 약간 더운 날씨에 열리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날씨가 덥고 코스가 남쪽을 향해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직진하는 코스다 보니 각 잡고 경쟁하는 풀파워 러닝보다는 조금 페이스를 낮춰 길가에 응원 나온 사람들과 호응하며 대회를 즐긴다. 




둘 다 인기가 많은 대회다 보니 대회규모가 2만 5천 명이나 되는데도 참가신청이 쉽지 않다. 

선착순 접수인 여타 대회들과 다르게 뉴욕시티 마라톤처럼 추첨, 기록인증, 기부금, 대회참여실적 등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참가신청을 받는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추첨은 나 같은 거주자에겐 굉장히 불리하기 때문에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서) 해마다 이 두 대회를 참가 신청조차도 못해보고 구경만 하는 신세였다. 그러다 운 좋게도 브루클린 하프의 참가권이 생긴 바로 올해! 

대회를 2주 앞두고 무릎을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3년 동안 일주일에 2번, 많게는 4번까지 달리기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어딘가를 다쳐본 적이 없는 내가 하필이면 이 귀한 대회를 앞두고 걷지도 못할 만큼 심하게 무릎을 다친 것이다. 



사실 브루클린 하프는 편안하게 즐기는 분위기의 대회라고 썼지만, 나 나름대로는 기록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흔치 않은 홈그라운드 경기인 데다가, 뉴욕시내에서 열리는 대회 중 가장 지형조건이 좋은 대회이기 때문에 나의 평생 목표인 하프마라톤 서브 2를 이번에는 꼭 달성하고자 15주간 맹 훈련을 해온 터였다. 올해에 뛰는 모든 대회는 11월 뉴욕마라톤을 위한 디딤돌이기 때문에, 이번에 하프 서브 2를 달성하고 11월에 조금 더 좋은 출발그룹으로 배정받으려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록 경신은커녕 완주조차 불투명할 만큼 부상을 당하고 보니 "다치면 말짱 황이다"라는 말이 뼈저리게 와닿았지만 이미 늦은 것...



불안한 마음에 달리기를 완전히 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훈련을 계속할 수도 없는 마음 시끄러운 날들을 보내며 '오늘은 괜찮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를 품고 조금 뛰어보면 또 아프고, 이삼일 쉬고 또 조금 뛰어보면 또 아프고를 반복하다 보니 대회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대회에 아예 가지 않을 것인가, 뛰다가 아프면 기권하고 집에 올 것인가, 기어서라도 완주할 것인가... 




기권이라니...
기권은 어떻게 하는 걸까? 


그냥 코스에서 이탈해서 집으로 오면 되는 걸까? 길가에 응원단이 빼곡하게 나와있을 텐데 거길 뚫고 빠져나오려면 사람들이 수군거릴까?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볼까? 아니면 아예 엄청 아프다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메디컬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까? 언젠가 코스에서 본 사람들처럼 빨간 들것에 실려나가는 걸까?

걸어서 피니쉬 한다는 건 또 어떤 걸까? 나는 빠르진 않아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평균적인 러너였다. 선두그룹이 어떻게 뛰는지도 모르지만, 맨 뒷그룹이 어떤지도 모른다. 터덜터덜 걷고 있으면 뒤에서 따라온다는 스쿨버스 눈치가 보여서라도 타게 될까? 



그렇게 입속이 깔깔할 만큼 고민과 생각을 거듭하던 대회 전날.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의문 아래에 수치심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말로는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완주 자체보다는 준비하고 훈련해 온 모든 시간에 의미가 있다고 떠들어대면서도 실제로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완주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코스에서 걷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것이 무엇보다도 부끄러웠다. 



코스에서 무릎이 너무 아파 실려 나오게 된다 할지라도, 혹은 코스의 대부분을 걷는다 할지라도. 내가 달려온 지난 3년은 언제나 떳떳하고 열심히 훈련하다 얻은 이 부상도 자랑스럽다. 애초에 내가 얼마나 달리기를 잘하는 인간이었다고 그깟 기록이 몇십 분 늦어진다고 그게 부끄러울 일인가. 

그렇게 양쪽 무릎과 한쪽 발목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대회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껏 나가본 그 어떤 대회보다도 꿀잠을 푹 잤다. 




NYRR 브루클린 하프 마라톤 코스 맵


공교롭게도 이번 대회에서 나는 출발 A넘버를 배정받았다. 

NYRR은 번호표 앞에 알파벳이 붙어서 그 알파벳 순으로 줄을 서서 출발한다. 앞에서부터 빠른 순서로 배정되는 출발넘버에 A를 단 것은 정말 처음이고, 앞으로도 과연 이런 일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 빨라서 A가 되었느냐 하면 사정은 조금 복잡하다. 



규모가 큰 대회는 출발조가 1조와 2조로 나뉜다. 이번 대회도 7시에 출발하는 출발 1조와 7시 45분에 출발하는 2조가 있었다. 나는 이 2조의 A넘버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딱 평균 그 자체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보다 몇 초 정도 빠른 러너들은 1조 L넘버를 받았을 것이고, 나는 몇 초의 차이로 2조 A넘버가 된 것이다. 



그래도 A는 A라서, 7시 45분이 되어 출발선 앞으로 2조 A넘버 러너들이 정렬한 뒤에는 대회를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국가제창을 한번 더 하고, 뿔피리도 불어주었다. (B넘버부터는 따로 뿔피리 없이 A넘버 러너들이 빠져나가는 만큼 뒤에서 앞으로 이동하며 출발한다)

이 A그룹 뽕이 엄청나다는 걸 내가 거기에 서보니 알 것 같았다. 심지어 앞에는 유도 오토바이도 있었다! 내가 대회를 뛰면서 한 번도 못 본 바로 그 선두 유도 오토바이가 말이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아직 러닝은 시작도 안 했는데 러너스 하이가 벌써 온 것 같았다. 그때, 얼마 전 아침 달리기를 같이 했던 바바라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철인삼종 러너인 바바라는 "초반에 대회뽕 맞고 폭주하다가는 그날 대회 망하는 거 한순간이다"라는 말을 길고 고상하게 잘 설명해 주었는데, 큰 대회일수록 출발 뽕이 세게 오니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흰색 경찰 오토바이에 반해 그걸 따라가다가는 5km도 못 가서 퍼져버리거나 무릎 통증이 와서 실려나가기 십상이겠다 싶어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B넘버와의 경계선인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훈련과 컨디션 조절을 잘했더라면, 자신감을 갖고 맨 앞에 설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에 속이 다 쓰릴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피니쉬라인까지 가는 것만 생각하기로.



코스는 

브루클린 뮤지엄 앞에서 출발해 프로스펙트 파크를 바깥쪽으로 뛰다가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뛰고 나와서는 남쪽으로 직진하는 코스다. 고저차가 꽤 있지만 경사지형은 프로스펙트 파크에만 있기 때문에, 파크 구간을 끝내고 직진코스로 나온 후에는 계속 내리막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직진구간이 훨씬 길어 보이지만 굽이굽이 뛰기 때문에 공원만 다 뛰고 나오면 이미 절반 이상 끝난 상태다. 



이 코스에서 내가 평생의 목표인 하프 서브 2를 기대했던 이유는, 내가 늘 뛰는 익숙한 공원에서 초반을 뛰고 오르막도 전반에만 있기 때문이다. 초행길은 더 멀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익숙한 길은 짧게 느껴지기 때문에, 비교적 기운이 덜 빠진 초반에 오르막 코스를 실제보다 짧은 느낌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정말 큰 장점이었다. 



내 계획은 목표 페이스보다 30초를 늦춰 초반 10Km를 뛰고, 공원에서 빠져나가 직진구간으로 들어갔을 때 아직 무릎에 통증이 없다면 진통제를 미리 먹고 목표페이스로 올리는 것. 무릎이 아플 때 상체가 앞으로 숙여지면 더 많이 아프기 때문에, 힘이 빠지는 후반부에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는 습관이 있는 나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허리를 펴고 뛰는 데에 집중했다. 



5월의 뉴욕은 꽤 더운 것이 보통인데 (작년에는 이 대회에서 열사병으로 사망자까지 나왔다) 올해는 비 예보가 있고 날씨가 추웠다. 그래서 바지도 긴바지를 입었는데 테이핑을 꼼꼼히 하고 긴 타이츠까지 입은 것이 무릎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대회날에 비가 온 적이 없기 때문에 내심 비 예보가 틀릴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역시나 비라고 하기엔 뭐 한 분무기로 살짝 뿌리는 것 같은 보슬비가 초반에 잠깐 내렸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흐렸고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습했지만 기온이 높지 않아서 달리기에 힘든 날씨는 아니었다. 물도 많이 마실 필요가 없어서 2마일에 한 번씩 있는 급수대를 매번 거치지 않고 두 번에 한 번씩만 물을 마셨다. 10km 이후부터는 물을 마실 때 에너지젤 한팩, 소금사탕 1개를 같이 먹고 타이레놀을 2알씩 먹었다. 다행히 통증은 없었지만 무릎이 뻐근해지는 느낌 (통증의 전조증상)이 있었기 때문에 급수대 맨 끝에서 멈춰 서서 코스 옆으로 잠시 이탈해 가로수를 잡고 장경인대 스트레칭을 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애가 타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언제는 빨랐냐?'를 스스로에게 되뇌며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조심했다. 비록 의식적이긴 했지만 후반부에도 상체가 굽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뛰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잠시 겸손함을 잃고 또 A 넘버 뽕이 차오를 뻔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언제는 빨랐냐?'를 외쳤다.




직선구간은 참 오묘했다. 

계속해서 내리막인 데다가 진짜로 쭉 뻗은 직선구간이라 저 멀리 끝이 보인다. 그 끝에는 바다가 있다. 코니아일랜드는 이름은 아일랜드지만 실제로 섬은 아니다. 과거에 섬이었지만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육지에 이어져있다. 이 대회를 이미 뛰어본 많은 친구들이 이 직선구간이 얼마나 지겨운가에 대해 누누이 이야기했었다. 사실 코스가 어떻게 생겼던 모든 대회가 후반부는 지겹다. 신기하게도 10km 대회를 나가면 후반 5km가 참 지겹고, 하프마라톤을 가면 후반 10km가 지겹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숫자로만 앞으로 몇 km라는 식으로 알고 가는 것보다 이렇게 골인지점을 눈으로 보면서 가는 코스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한걸음 떼면 한걸음 뗀 만큼 가까워지는 목표지점이, 언제 무릎 통증이 올 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과 고된 몸에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출발한 지 2시간이 지나자 12마일 표식이 보였고 공기에서 확연히 바다 냄새가 났다. 

그리고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에 신는 우천용 러닝화도 있었지만, 내가 가진 러닝슈즈 중 가장 무릎에 부담이 없는 신발을 골라신느라 방수 기능 따윈 없었다. 비가 쏟아지자마자 발가락이 젖는 게 느껴졌다. 내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느낌... 

그런데 갑자기 웃음이 났다. 원래 나는 하프마라톤을 가면 마지막 1마일은 빵 터진 사진 투성이다. 나 나름의 러너스하이인가 보다. 




딴 게 아니라 출발 후 2시간 땡 하자마자 비가 쏟아지는 게 웃겼다. 

출발하기 전 대기시간에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며 달리기 친구들과 농담을 했었다. 달리기 대회계 미스 선샤인인 내가 뛰니 비는 안 올 거라고. 만약 비가 쏟아지거든 내가 다 뛴 걸로 알라고.



목표시간이었던 2시간은 애당초에 물 건너갔지만, 비를 참고 붙잡아준 비구름은 2시간을 지켜주었다. 마지막 1마일은 비를 옴팡 맞으며 한걸음 한걸음마다 물이 쭉쭉 나오는 발을 찌걱거리며 해변을 달렸다. 마지막 코너를 돌아 저 멀리 피니쉬라인을 바라보며, 이것이 피니쉬라인인 것인가! 하고 감동했던 첫 번째 하프마라톤 생각이 났다. 이제는 대회도 여러 번 뛰어봤고, 주말에 그냥 한번 심심해서 10마일(16km) 정도는 뛸 수도 있을 만큼 소위 "짬"이 차서, '하프마라톤은 아무 준비 없이도 완주는 하지'라고 자만도 할 만큼 머리가 커져버린 나...


하지만 부상을 달래 가며 뛰어야 했던 첫 경험. 비를 맞으며 피니쉬 하는 첫 경험. 코스에서 이탈해 장경인대 스트레칭을 하는 첫 경험... 여러 가지 처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를 느낀 대회. 그리고 그래서 더욱 마라톤의 재미는 무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대회. 

그렇게 나의 세 번째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의외로 중간에 멈춰 서서 스트레칭도 하고 이거 저거 바빴던 거 치고는 기록도 좋아서 놀라운 대회;; 


매거진의 이전글 부상의 딜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