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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Jun 01. 2023

살림도 내팽개치고 외간남자 뒤를 졸졸?

D-158 고무밴드 이미지 트레이닝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반백수이기 때문에, 나는 달리기를 조금 이상한(?) 시간에 한다. 건실한 사회인들이 5시~6시쯤 아침 달리기를 하고 일터로 향하는 데에 비해, 나는 7시에 일어나 남편과 아이의 아침을 챙겨주고 아이를 등교시킨 다음 달리기를 한다. 그러니까 건실한 사회인들이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할 때쯤, 나는 달리기를 한다. 



아이를 등교시킨 다음 집으로 한번 왔다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가려고 하면... 온갖 유혹이 발목을 잡는다. 일단 운동복 입는 것부터 세월아 네월아 하는 데다가, 선크림도 더 꼼꼼히 바르고 싶고, 어차피 모자 속에 구겨 넣을 머리도 한번 빗고 하여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미뤄보려고 온몸이 발악을 한다. 

시험 전날에 꼭 책상 정리를 하고 싶었던 소녀는 아줌마가 되어서도 영락없이 달리기 하러 나가기 전에 아침 먹은 것들 설거지도 하고 싶고 청소도 하고 싶고 그렇다. 뭐 나쁜 짓(?)도 아닌데 설거지부터 하고 청소도 하고 그다음에 달리기 하러 나가야지. 어쩌면 건실한 주부로서 이것도 나의 업무이기 때문에 달리기보다 살림을 먼저 하는 게 도리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딴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젠 "해가 중천에 떠서 달리기를 못하겠다~"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집안 살림이 폭탄을 맞았던 뭐 하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아침에 일어나면 고민할 것도 없이 운동복부터 입고 러닝슈즈를 신고 나가야 된다. 아이를 등교시키면 거기서 바로 달리기를 시작한다. 



아침 차려먹은 흔적에, 설거지감에, 가족들이 여기저기 벗어던지고 나간 잠옷, 걸레처럼 꼬깃꼬깃 돌돌 말아놓은 이불 같은 건 잠시 잊고, 후련한 마음으로 훌훌 털고 달리는 기분은.

"역시 이래서 달리기가 최고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풍경도 보고, 주변에서 뛰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보고, 옆에 지나가는 자전거도 보고, 어디 부러진 나무는 없는지, 호수가 넘치지는 않았는지 오지랖도 넓게 슬렁슬렁 달리다 보면 가끔 나를 앞질러 치고 나가는 러너들이 있다. 과하지 않게 적당히 근육이 잡힌 몸매에 팔랑팔랑한 러닝복을 입고 훈훈한 미소를 흘리며 지나가는 남자 러너라면, 오늘은 한건 잡은 날이다. 



오늘의 자기는 과연 얼마나 나를 숨 가쁘게 해 줄는지, 과연 얼마나 오래 가는지, 잘못된 상대를 고른 건 아닌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두근거리며 따라간다. 이럴 때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고무였나? 라텍스였나??? 하여간 그 신축성이 좋은 그것을 말이다. 




자진신고 하시고~


다름이 아닌 고무밴드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5미터쯤 앞에 가는 러너와 내가 가상의 초대형 고무밴드로 기차놀이를 한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뛰는 것으로, 거리가 더 벌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같은 속도로 뛰는 것이다. 가능하면 발걸음도 똑같이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면 보폭 훈련까지 된다. 당연한 거지만 빠른 러너를 선택할수록 더 고된 훈련이 된다. 그래서 나는 다소 빠른 남자 러너들을 목표물(?)로 설정하고 따라간다. 



이 고무밴드 이미지 트레이닝은 실제 경기에서도 꼭 활용하라고 코치들이 가르치는 방법인데, 마지막에 힘이 빠질 때 내 앞에서 뛰고 있는 러너와 내가 고무밴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하며 뛰면 어느 정도 추진력이 생기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세계에서는 "피 빨기"라고 해서 다른 자전거 뒤를 따라가면 공기의 저항을 덜 받는 일종의 얌체짓이라고도 한다던데, 공기저항의 영향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장거리 달리기의 세계에서는 딱히 얌체짓은 아니다. 1미터 이내로 바짝 붙으면 공기 저항을 덜 받을 수도 있겠지만 고무밴드 이미지 훈련은 5미터 정도 앞에 있는 러너의 전신을 보면서 한다.



하지만 뭐, 마음속에서는 늘 감사의 인사를 한다. 

오늘의 자기는 진짜 강한 남자였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같은 속도로 따라 뛰면서 내 시계에 찍히는 속도를 보면 그게 나의 속도이자 그의 속도. 

워후. 엄청나다.

더 이상은 숨이 차서 못 따라가겠다 싶은 순간이 오면 가상의 고무밴드를 풀고 가상의 감사인사도 보낸다. 



형국은 딱, 집안살림 내팽개치고 외간남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형국이지만

보람찬 훈련이었다.



(아 물론 꼭 남자러너들만 따라가는 건 아니고 나보다 빠르고 자세가 멋진 소위 "각좀 잡힌"러너라면 누구든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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