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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May 14. 2024

NYRR 우먼스 하프 2024 대회후기

뉴욕 로드러너스 NYRR이 하는 대회 중에 여자만 뛰는 대회가 2개 있다. 그중 하나가 6월에 열리는 mini 10K, 그리고 4월에 하는 우먼스 하프다. 


mini 10K는 과거 보스턴 마라톤에서 여자 러너를 못 뛰게 했던 시절에 그 반발(?)로 뉴욕 로드러너스가 시작한 대회다. 이름은 미니지만 10K를 단축해서 뛴다는 뜻은 아니고 당시 여자들의 자유의지의 상징이었던 미니스커트를 의미한다고.


두 대회 다 명목상은 여자들의 레이스지만 남자라고 해서 참가등록을 거절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미니 10K는 남자들도 많이 뛰는 걸 봤는데 아마도 이름에 딱히 '여성전용'이라는 느낌이 없다 보니 잘 모르고 참가등록을 한 남자 러너들이 많았던 것 같다. 


반면 이 우먼스 하프는 이름부터 대놓고 여자 하프마라톤이기 때문에 정말로 (어쩌면 당연한 건데) 남자 러너는 없었다. 




여고시절의 찬란함과 치열함



뉴욕에서 3-4월은 하프마라톤을 뛰기엔 아주 애매한 계절이다. 달릴 때는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의 날씨지만 뛰고 나서는 겉옷이 필요하다. 새벽같이 나가야 하는 대회날의 특성상 갈 때도 겉옷을 입고 가야 한다. 그 말은 가방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이게 아주 성가셨다. 8300명이 뛰는데 8300명 거의 모두가 가방을 맡겼다... 원래도 가방은 남자보다 여자러너들이 많이 맡기는 편인데 8300명 전원이 여자다 보니 가방 맡기는 줄이 엄청났다!! 

보통은 출발 10분 전에는 대기구역에 들어가서 시계도 켜놓고 음악도 켜놓고 준비를 하는데 이날은 가방 맡기는 줄에 출발시각 직전까지 서있었다. 하마터면 가방을 들고뛸 뻔했다. 


대회장은 여느 때와 다르게 화사했다. 지급된 대회복도 핑크색이었고, 대회복이 아닌 옷을 입고 온 사람들도 핑크색이 많았다. 너도나도 예쁜 옷과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육체미를 뽐내며 하나같이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여고시절같이...


(하지만 나는 여고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그렇다는 뜻이다 ^^;;;)





엄마가 딸에게


하지만 여자들의 마라톤이라고 해서 화사하고 우아하게만 달리느냐 하면 절대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뛰어본 그 어떤 대회보다도 경쟁이 치열했다. 대회에서 처음으로 남의 팔 치기에 명치를 얻어맞는 경험도 했다. 

코스에서 토하는 러너들도 여럿 봤다. 아니 여럿 본 정도가 아니라 뉴욕시티 마라톤(풀코스) 때보다 더 많이 봤다. 


코스에서 우는 러너도 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누가 봐도 10대 소녀였고 코스 옆에서 엄마로 보이는 사람에게 혼나고 있었다 ㅜㅜ 

세상에 어딜 가도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맹모삼천지교를 들먹일 것도 없이 자식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때론 스스로를 포기하고, 때론 엄하게 다그치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 어딜 가나 있다. 어쩌면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나도 뛰어 스쳐 지나가며 들은 거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다 너를 위한 거야' '끝까지 뛰어야 해'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엄마의 대사도 어쩌면 그렇게 다 똑같은지... 



나도 어린 딸을 하나 키우는 엄마로서, 어떤 사정인 지는 모르겠으나 내 딸이 하프마라톤을 반드시 완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과연 코스에서 우는 아이를 다그칠 수 있을까. 아마도 적어도 마라톤 코스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나는 마라톤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게 마라톤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시험, 발레, 체조, 음악콩쿨 등등... 내가 그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라면? 아마도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이 나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왼발 앞으로 오른발 앞으로를 반복했다.





하프마라톤
이름이 하프라고 해서
반만 뛰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코스는 정말 힘들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센트럴파크는 깔짝 걸어가서 커피나 한잔하고 오면 도심 속의 낭만이지만, 저걸 뛰려고 하면 생지옥이다. 무엇보다 오르막 내리막이 쉼 없이 나오고, 북단 왼쪽에 정말 길고 험한 업힐이 있는데 거기를 기어오르기가 정말 너무 힘들다. 심지어 센트럴파크는 한 바퀴가 10km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프마라톤을 뛰려면 그 언덕을 두 번 넘어야 한다. 첫 번째 넘을 때는 그나마 할만했지만 두 번째엔 걷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프마라톤은 이름이 "하프"다 보니 반만 뛰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는 반대로 저걸 더블 10K 대회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같은 루프를 두 번 뛰니까 더더욱 10K를 두 번 뛰는 느낌이 강하다. 풀코스 마라톤에 비하면야 정말 반의 반도 안 힘든 게 하프마라톤이지만 10K를 두 번 뛰는 것보다는 훨씬 더 힘들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중독


그러니 거리 상관없이 모든 대회는 똑같이 다 힘들다. 

5K라고 무시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 5K는 5K의 고통이, 10K는 10K의 고통이, 당연히 하프는 하프의 고통이 있고 거리에 상관없이 모든 대회는 다 힘들다. 풀코스 완주자니까 하프는 껌이겠죠? 라고 묻는다면 글쎄... 



나는 달리기를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생각한다. '밑빠진 독'까진 아니더라도, 구멍난 물통에 물 채우기다. 쉼없이 부어야한다. 새어나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부어야한다. 

마라톤을 완주한 날로부터 나는 쉼없이 늙고있다. 체력이 빠져나간다. 장거리 달리기는 성별과 나이가 깡패다. 왜 보스턴 참가자격이 5살 단위로 10분씩이나 깎아주는지를, 몸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바닥에 있는 구멍으로 새어나가는 물을 막지 못한다면, 그보다 빠르게 위에다 채워넣는것 외엔 방법이 없지 않은가.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있다고 해서 허망해 할 필요는 없다. 길 위에서 보낸 숱한 시간에서 배운것이 하나 있다면, 겸손해지는 것. 내가 더 많이 채우지 못하더라도, 쉼없이 채워넣고 있다는 이 근면함이 가져올 아주 작은 결과라도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




지난번 NYC하프를 아무 준비없이 뛰고, 심지어 초반에 주제파악 못하고 오버페이스를 하는 바람에 두번이나 걷는 치욕(?)을 겪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동안 아주 고강도는 아니어도 훈련도 열심히 했고, 페이스 조절에도 신경써서 이번엔 걷지 않고 마지막까지 뛰어 완주했다. 목표는 2시간 4분이었는데 이러저러한 핑계로 3분 늦어 2시간 7분에 완주했다. 현재까지 내 하프 기록 중 두번째로 빠른 기록이고, 지난번 NYC하프에 비해 6분 단축한 기록이다. 



기록은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를 먹으면 기록이 떨어지는것도 당연하고, 아니면 반대로 경험이 쌓이는 만큼 더 빨라질수도 있다. 

중요한것은 그 코스에 얼마나 진심이었느냐는 것.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95점정도는 주고싶은 대회였다. 





평생 운동치 몸치로 살아온 여자의

인생 첫 마라톤 도전기 [인생에서 한 번은 뉴욕마라톤을 뛰자] 매거진에서 만나보세요 :)

https://brunch.co.kr/magazine/ny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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