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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담 May 29. 2024

러너가 하얀 피부와 바꾼 것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반바지를 입는 계절이 왔다. 해마다 이 시즌이 되면 내 다리와 등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지난여름에 입었던 반바지 + 싱글렛 자국이, 긴팔을 입는 겨울 동안 없어졌겠거니 했는데 아직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반바지와 그 싱글렛을 입는다. 

그게 벌써 4년째다.




흔히 "교포 스타일"이라고 하는 게 있어서 은근히 조롱거리다. 

묘하게 촌스러운 화장 (특히 눈썹)과 약간 옛스러운 헤어스타일(앞머리 없이 긴 생머리를 옆가르마로 넘겨서 볼륨을 확 주는 그거;;;), 그리고 거기에 화룡점정 바로 그을린 피부다. 내가 미국으로 건너올 때 '절대 저것만큼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교포의 시계는 미국으로 건너온 시점에서 멈춘다는 법칙을 나도 피해 가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위에 쓴 세 가지 나도 다 하고 있다는 게 포인트




짙은 라이너로 입술 테두리를 쳐버리는 수준까진 아니어도, 어쨌거나 10 수년 전에서 멈춰있는 나의 메이크업 스킬과 (그나마 메이크업을 자주 하지도 않아서 굳어서 버리는 화장품이 다수...) 입으면 온몸이 편해서 약간 뚫렸는데도 그럭저럭 계속 입게 되는 옷 등등 교포 그 잡채가 되어버린 (말투라도 요즘세대처럼 써본다) 나지만,

그래도 화장이나 옷은 어느 날 굳게 마음을 먹고 "나 한국인으로 돌아갈래!!" 하면 될 수도 있는 일. 


K 타운 가서 틴트 사고 에어쿠션 사면 그래도 흉내는 내지 않을까...?  




그게 안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피부다.



어쩌다 시내에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하얗다.... 어쩜 저렇게 피부가 곱고 하얄까... 아니 한국은 해가 안 떠??? 



하지만 이런 나도 피부만큼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처음 몇 년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피부를 지켰다. 누구 말로는 미국이 공기가 좋아서 살이 더 잘 탄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여름 햇빛은 단 하루만 방심해도 탄다. 그래서 아무리 더운 날도 긴팔에 긴 옷, 챙 넓은 모자에 선크림까지 두둑이 발라야 밖에 나가는 생활을 했으니, 나가는데 준비하는 시간이 2시간 나가서 1시간이면 지쳐서 돌아올 지경.




그렇게 지켜온 피부였건만... 달리기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는 그을리는 게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긴팔옷에 웬만하면 모자도 쓰고, 선크림으로 거의 목욕하는 수준으로 바르고 나가는 정성을 쏟았으나...




어느 한여름의 대회 날. 

도저히 이러다간 내가 탈수되어 죽겠다 싶을 만큼 더웠던 대회날, 

어디 남사스럽게 겨드랑이를 드러낸단 말인가! 하며 못 입던 싱글렛을 자발적으로 입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 

느껴버린 것이다.




나의 허여멀건한 어깨와 등짝.

뭐야 나 달리기 되게 못하는 사람 같아!!!





그래서 뭐랄까, 

희고 고운 피부가 대수냐 나는 "가오"가 중요한 사람이기에

비록 12,000명 중 6,000등 하는 중간러너여도 피니쉬 할 때만큼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올림픽 금메달 따러 가는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숨차게 뛰지도 않았는데) 피니쉬라인에서 침도 한번 뱉는 ;; 퍼포먼스를 해줘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피니쉬라인을 통과한 순간 우리 모두는 승자라고. 금메달 따러간 거 맞잖아.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날이 얼어붙게 추운 날이 아니면 무조건 싱글렛을 입었다. 

물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크롭탑까지 입었다. 

대기구역에서 몸을 풀 때, 옷 밖으로 나오는 살은 무조건 구릿빛 이어야 한다. 그걸로 내가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대체 누구를 왜 기선제압을 하는진 몰라도 하여간 해야 한다. 

그렇게 4년째 싱글렛에 반바지를 입고 여름을 나니 이제는 "이거는 타투화 되어버린 거야. 안 지워질 거야"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더 짧은 바지!

더 작은 상의!!!

어떤 옷을 입어도 흰 살이 나오지 않게

구워 온몸을!!! 




이렇게 보면 '와, 레저 스포츠 좀 즐기시나 봐요' 하는 수준인데
내 원래 살은 이런색이었다는게 놀라울 뿐



이럴 바에야 아예 손바닥만 한 수영복 입고 앞뒤로 노릇노릇 구워야지 하고 시도했는데도, 신기하게도 저 자국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번달에 나는 누적거리 4천 km를 달성했다. 

4천 킬로미터를 길 위에서 뛰며 생긴 햇빛의 궤적이 몇 시간의 태닝으로 지워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4천 킬로미터의 노력은 고스란히 내 몸에 새겨져 없어지지 않음을 믿는다.





그래서 희고 고운 피부와 바꾼 것은 "가오"인가요?


신기하게도 더 짧은 옷을 입으면 입을수록 나의 기록도 향상되었다. 

통풍이 좋아져서 체온조절이 어떻고...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 숏타이츠에 크롭탑 입었으면 이 정도는 뛰어줘야지 하는 '가오'가 작용했던 게 확실하다. 정말 숨이 끊어져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와 저 여자 옷은 선수급으로 입었는데 이거밖에 못 뛰냐' 할까 봐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하지만) 

조금 더 스스로를 쥐어짜고, 

그 노력이 쌓이고 쌓여 나는 인간 개조에 성공하는 중이다. 이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적이라는 "나 자신"과 싸워 이겨나가는 

그 과정의 증표이기에

나는 이 피부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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