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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슈 May 03. 2021

만월, 베이글이 밝아요


 안녕하세요, 빵며드는 밤이에요. 저녁 7시 45분. 어둑해지는 하늘 위에 뜬 보름달이, 지나치리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끔 자연이란 뭘까, 어떻게 저렇게까지 빛날 수 있을까- 믿기지 않아요. 저의 작은 가슴으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예쁘다는 생각을 해요. 땡글 동글 귀여운 보름달. 보름달은 저에게 동그란 것들을 연상시켜요.


 동그란 보름달. 동그란 음식들.


오늘도 모나게 굴었지만 사실은 둥글어지고 싶었던 마음들.


낮에 사무실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따끔따끔 마음속에 남아있어요. 사람들은 조금 더 동그랗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의 스트레스는 오늘의 먹을 것으로 날려버려야지, 하고 생각해요.





 있잖아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든 음식에 대한 영감을 주곤 해요. 매일 먹고살아야 되기도 하고. 또 저는 사람을 만나면 만화책에 나와 있는 말풍선처럼, 음식이 그 사람 얼굴 옆으로 몽실몽실 떠다녀요. 오늘은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티브이 화면을 보아도 그렇네요. 까맣게 꺼진 액정을 보면서 어쩐지 내일은 김밥이 말고 싶다고 생각해요. 네모나고 까만 김이 떠오르니까요. 김밥 마는 판에다가 눕혀서 오징어포랑 밥만 얹어줘도 맛있을 것 같지 뭐예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겠지만 저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에는 음식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뭐랄까, 제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나 할까요.


 요즘 준며드는게 유행이라고 해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드는 그 감각. 그렇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제 몸에는 음식과 음주가 스며들어 있었나 봐요. 인턴쉽을 통해서 첫 월급을 탔을 때도, 저는 그 금액이 빵 몇 개, 혹은 생맥주 몇 잔으로 환산될지를 제일 먼저 생각했어요. 입사해서 월급이 조금 더 됐을 때는, 내 위장에 앞으로 들어갈 치킨의 마릿수를 헤아리며 행복해했죠. 요즘도 물건들 간의 차액에 고민이 될 때에는, 좋아하는 술집의 안주들을 상상해요. 비싸지만 아름다운 브런치 식당과, 1인분을 시키면 다섯 입쯤에 사라지는 양곱창 집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것은 5겹 휴지를 살까 8겹 휴지를 살까 하는 작은 고민에도 도움이 되지만, A라는 차를 살까 B라는 차를 살까 할 때도 신기하게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에요. 휴지의 겹수에 따라 휴지 가격은 5000원 정도 차이가 나겠지만, 그것은 내가 다음번 카페에 갔을 때 케이크를 추가할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해결해 줄 만한 금액이에요. A보다 비싼 B차를 사면, 핫한 와인바 탐방은 한 달에 네 번에서 한 번으로 줄여야 할 테지요. 여담이지만, 저는 저에게 조각 케이크를 맘껏 먹을 자유를 주기로 결정했고 와인바는 한 달에 한 번만 가기로 했어요. 저에게는 7900원짜리 노브랜드 와인도 있으니까요. 아파트 정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달을 바라보며 마시는 저렴한 와인 반 병. 그 순간이 제법이나 행복하거든요.


음식은 너무나도 삶을 어떻게 사는가 하는 방식이나,

나의 소비의 방식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요.





 아, 음식에 대해 떠들다 보니 금세 허기가 지네요. 간단하게 먹기로는 베이글 샌드위치 만한 것이 없죠. 저에게, 빵은 역시 너무 각별한 존재예요. 앞서 쓴 글들에 빵과 술 이야기가 적은 것은 뭐랄까, 그런 음식의 범주에 함부로 넣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빵과 술은 음식메뉴 몇 개 이상의 가치만큼 커다란 덩어리로 제게 존재해요. 독자적으로 할 말이 너무 많은 영역인 것이죠. 그런 소중한 빵의 많은 종류 중에서도 가ㅡ장, 아니 거의 매일 먹는 빵을 고르라면 베이글이에요. 그 쫀득쫀득하고 담백한 맛과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형태는 어떤 빵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식사 대용으로 들고 다니기에도 이만한 것이 없어요. 기본은 구워서 잼을 발라 먹어요. 아,맛있다. 베이글은 또 반으로 갈라 먹는 맛이 있지요. 그 안에는 버거처럼 무엇이든 들어갈 자리가 가득한 점이 또 매력적이에요. 정말이지 베이글이란 녀석은 넉살 좋고 너그러운 음식이랄까요!


 베이글을 자르고 계란도 양상추도, 치즈도 넣어봐요. 연어든 햄이든 넣어도 좋겠지만 샌드위치의 핵심은 역시나 크림치즈와 소스죠. 다양한 맛의 베이글과 크림치즈의 존재를 처음 경험한 것은 보스턴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때였어요. 하숙집의 맞은편에는 베이글 전문집이 존재했고, 쇼케이스의 유리창 안에는 한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열 가지 이상 맛의 베이글이 있었어요. 오색찬란한 색의 크림치즈들도 함께요. 언제나 기본이 우선인지라, 플레인 베이글을 처음 사서 물었을 때, 지금껏 그전에 한국에서 먹어봤던 베이글들이 정말 팔꿈치로 대충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보스턴의 베이글은 더 풍미가 깊고, 고소하고, 쫄깃했어요.


가장 좋은 점은 매일 다른 크림치즈를 더하면,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는 센스 있는 남자 친구 같았다는 거죠. 질릴 틈이 없었어요.





 요즘 한국에서 가장 즐겨가는 베이글 집은 압구정 로데오 근처에 위치한 '뉴욕라츠오베이글스'에요.


어머나, 이곳도 미국에서 온 곳이긴 하네요. 일단 들어서는 곳부터 싱그런 초록들이 맞아주면서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마냥 긴 골목을 쭉 따라서 걸어 들어가면요. 그러면, 상냥하고 따스한 마당이 나온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맛있는 공기와 적당한 소란스러움로 가득한 공간. 햇살이 70프로쯤 공간을 채워요. 집에서 자전거로 출발하면, 라츠오베이글까지는 약 한 시간 십 분 정도가 걸려요. 주말 아침, 베이글을 흡입하기에는 딱 좋은 운동감이에요. 중간에 학여울역을 지나고 펼쳐지는 천들과, 잠실 가까이의 눈부신 한강 풍경은 덤이죠. 기분 좋게 숨을 헉헉거리면서 베이글 집의 문을 열면요- 음, 고소한 냄새! 오늘은 어떤 맛의 크림치즈를 선택해볼까. 생각만 해도 즐거워져요. 입꼬리가 쓰윽 올라가고 눈에서 빛이 나는 느낌. 주말에 작은 여자가 지나치게 행복한 표정으로, 동-그란 베이글의 자태에 감탄하며 실실 웃고 있다면, 그게 바로 저일 거예요.






 베이글을 한 입 앙- 베어 물고 싶네요. 담백하고 쫄깃한 맛. 다른 빵보다 담백한데, 앞서 말했든 도통 질리지가 않아요. 도대체 몇 년을 사귄 거야.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라고 결심하지만 박상영 작가님이 그러하셨듯 저라고 결심을 지킬 수 있을 리가 만무하네요. 베이글에 대한 글을 밤 열한 시에 마무리하기로 작정한 건, 아무래도 섣부른 선택이었나 봐요.




보름달을 쳐다보면서 베이글을 냠냠 먹고 있으면, 세상의 동글동글한 기운이 나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 들어요. 이내 가득 찬 배가 동그랗게 튀어나오면, 내 맘속의 모난 고민들도 동그랗게 다듬어져 굴러가기를 빌어요.  


만월이네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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