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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Jun 20. 2024

게으른 완벽주의자 해방의 날

경험주의자가 될 테야!

2024년 3월 27일 수요일 일기

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경험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버킷리스트계의 양대 산맥을 뽑아보자면 '세계여행'과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아닐까 싶다. 


나의 버킷리스트에도 어김없이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던 이 꿈은 회사원 시절 tvn의 <스페인 하숙>을 보며 더욱 커져만 갔다. 비슷한 시기, 그림 에세이를 자주 읽으며 그림에 대한 작은 동경을 갖게 되었고 그리하여 버킷리스트를 아래와 같이 약간 수정했다.


-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매일 그림일기 그리기!




쉥겐협악의 존재를 몰랐던 발리 한달살기 시절, 순례길을 걷기 전 그림 연습을 좀 해두자 싶어 천진난만하게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하얀 백지 앞에서 내 손은 무엇도 그려내질 못하고 방황했다. 미술 선생님의 칭찬과 함께 화가를 꿈꾸던 어린이는 한 획이라도 잘못 그으면 그게 마치 인생의 실패라도 되는냥 어떤 선도 쉽게 긋지 못하는, 그림 그리는 것이 두려운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림 그리기를 애써 모른 척하며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났다. 그러던 치앙마이 한달살기의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내 마음속 게으른 완벽주의자 녀석이 눈에 띄었다. 처음부터 짠! 하고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녀석, 멋진 그림을 그리지 못할 바에는 시작도 하지 말라는 녀석. 이 녀석을 혼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경험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인스타에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오늘부터 100일간 매일 그림일기를 그리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1일 차 그림일기를 올렸다.


1일 차 그림일기




1일 1컷 그림일기 100일 챌린지라는 거창한 이름과 함께 호기롭게 그림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일기 초반에는 단순한 그림 한컷을 그리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려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벅차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기는 썼는데 그걸 도무지 그림으로 그릴 자신이 없어 그릴만한(?) 일기로 바꿔 쓴 적도 있다. 그럼에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노숙을 하던 날에도, 2만보를 걸으며 빈 시내를 활보했던 날에도, 플리트비체에서 비를 쫄딱 맞고 돌아온 날에도 100일간 어김없이 자기 전이면 그림일기를 그렸다. 


태국 치앙마이 그림일기, 수영 그리고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헝가리 부다페스트 그림일기, 토카이 와인과 랑고스


오스트리아 빈 그림일기, 비엔나 소세지 핫도그와 클림트의 키스


북마케도니아 오흐리드 그림일기, 그림 같은 자연에서 일하는 우리와 고양이


치앙마이에서 시작한 1일 1컷 그림일기 100일 챌린지는 부다페스트, 동유럽 여행을 거쳐 오흐리드에서 100일을 맞이했다. 100일 이후에도 그림일기를 계속 그렸고, 얼마 전 180일을 맞이하며 후련하게 마무리했다. 인스타 피드를 찬찬히 살펴보니 객관적으로는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는 100개의 그림들이 쌓여있다. 100일 정도 그리면 그림 실력이 좀 늘 줄 알았는데 딱히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더라. 


그래도 괜찮다. 그림에는 큰 변화가 없었을지언정 나에게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100일간의 그림일기 챌린지를 통해 무엇이라도 일단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하얀 백지 앞에서 선 하나를 긋지 못해 망설이지 않는다. 100일 중 30일 정도 그렸던 '앉아서 노트북 하는 사람'은 30초면 뚝-딱! 하고 그릴 수 있다.


매번 작심삼일 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살았다면, 이제는 나도 무엇인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멋지게 포장된 결과가 아닌 엉망진창인 과정 또한 타인에게 공개할 용기가 생겼다. 어리숙해 보이는 과정 또한 내 모습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그림일기 100일 챌린지의 성공은 완벽주의자인 '척'하지만 사실은 게으르며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던 내가 꾸준함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경험주의자의 길로 들어서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어주었다.


앞으로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경험주의자의 마음으로 도전하자. 도전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니까!


게으른 완벽주의자 해방의 날이다!


p.s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일만 남았는데...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그림일기 100일 차, 게으른 완벽주의자 해방의 날! 오예!



p.s 브런치 여행 크리에이터로 선정되었어요! 에세이 크리에이터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지만... 브런치북의 제목 때문인지 여행 크리에이터가 되었네요. 아무렴 기쁩니다 ~~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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