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 스님으로부터 현각까지】
스님이 되는 팔자는 기구한 운명으로 역사에서 오해를 받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 운명이기에 접근이 조심스럽다. 그분들은 108 번뇌 속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알고, 기존의 사회에 세심하게 발길을 내딛는다.
압해정씨는 원래 중국의 제갈공명과 관련된 성씨이다. 공의 관념은 단순한 묵언수행으로 찾아드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묵언을 통하여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그 대표적인 분이 석두 스님이다. 스스로 바보라 칭하셨지만, 묵언을 통하여 돌고래가 되었으며, 초음파와 공명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공명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 결과가 나의 테르기술이었다. 영광정씨, 영성정씨도 그러한 성씨의 부류였다.
정약전께서 가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실 때, 해양생태를 연구하시며, 실학에 매진하셨다. 그 열정과 노력의 정수가 자산어보이다. 옛 굴비에는 머리에 돌이 들어 있었다. 돌을 공명하여, 조기를 동휘하셨던 비밀은 제갈공명의 천재적인 비기의 일부로 전수되었다. 석두 스님의 이름은 명불허전이었다. 영광굴비는 공명 기술의 집약체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생활에서 초의선사와 연을 가지시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여러 저서를 저술하셨다. 기독교적이고 서양적인 문명과 문화를 우리나라에 맞게 적용하시려는 노력이셨다. 주역과 역학을 미신으로 폄하하지 않고, 실학의 일부로 연구하려는 마음갖음은 그러한 열정과 정신의 심혈이었다.
정전제는 그 당시의 거름이 귀하던 시대에, 짜낸 서구의 한 단편이나, 오늘날에는 약초재배에 휴경농이 중요하기도 하다. 단표누항을 언급한 송순은 가사문화의 창시자시고, 연일정씨인 정철에게서 가사문화의 진수가 꽃피었다. 연일정씨도 압해정씨의 부류시다. 출사표를 내건 제갈공명은 원균과 같은 비장한 심정이었으며, 한반도에서 소박한 안빈낙도를 꿈꾸셨다.
이순신이 아닌, 원래 '생즉사 사즉생'의 비장한 기개를 품은 삼풍백화점의 한으로 역사에서 지워져간 전의이씨(원균의 후손)도 가을의 전어로 입맛을 돋우며 찾아든다. 부산에 자리 잡은 원균의 후손은 일본을 등지고 해동용궁사에 깃드셨으며, 신발공장에서 부터 삼풍백화점을 일궈냈지만, 시류의 안타까움에 또다시 정유재란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말았다. 태양은 본래 일본이 아닌, 해동성국 전유문화의 일부였고, 남미의 태양신으로 까지 연어의 숨결로 떠올랐다. 대마초도 오류이고, 남미의 식생인 아삼을 들여온 후손들이 그들일지도 모른다. 삼국유사의 세심한 고증이 필요한 이유이다.
'원소'에서 시작된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염'의 '사마륨'에 굴복한 제갈공명의 서글픔을 품은 음식이 굴비이다. 사마륨은 추위와 더위에 강했으며, 우라늄과 달리 유전자의 변형 없이도 풍토병에도 잘 견디는 이점을 품었다.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낸 향기 없는 꽃도 그러한 이치로 사다함과를 일컬었고, 전쟁 준비에 풍토병과 세균전을 대비할 비책을 여쭤보는 재치였다.
공명에서의 '공'자에 '갈고리 궐'자를 빼면, '아들 자'자나 '깨달을 료'자가 되는 이치는 누구의 재치였던가? 남은 자를 다시 엇비슷하게 쓴 자가 '고무래 정'자이다. 불교에서는 낚시를 권하지 않으니, 석두 스님의 기지가 미래의 혜안을 품으셨다.
정약용과 친분이 깊으셨던, 초의선사는 본래 삼베를 전수한 후손인데, 삼국유사에 그에 대한 유래가 깃들어 있다. 초의선사의 '초'자와 전의이씨의 '전'자가 선택되어 조합된 파생어로 등장한 초전도체는 두성씨가 남미에서 아삼을 들여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래의 후손들이 알리려 한 의도는 아닐까? 신라가 신라방을 당나라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남미에도 그와 같은 유적이 있으리라! 해동성국의 태평성대는 한반도가 교류의 허브였음을 알게 한다. 시대를 알고, 시기상조가 아닌, 적기를 간파하며, 주변을 아울러 호소하는 선덕여왕의 통치철학을 함양 못 한 좌익의 의뭉함이 까치가 알려주는 정겨운 여명의 지저귐으로 반면교사한다. 트럼프의 통치철학은 까치의 지저귐 같이 그 반면교사를 꿰뚫는 반갑고 정겨운 혜안이자, 지혜이다.
양초를 정약용과 괴기탕이라며 끓여 드시던 전래동화에서 초의선사께서는 한봉을 치신 슬기를 전수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코와 귀를 베인 분들이 밀랍으로 코와 귀를 만들었던 기지는 밀랍인형 제조기술로 이어진다. 초의 기원은 초의선사로 올라갈 것이다. 프로폴리스도 화분에 모인 피톤치드의 변환물이라는 걸 이르신 분도 어머니께서 경주최씨이신 초의선사이시다.
화순 자치샘에는 천은 스님의 탄생이 깃든 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화순은 온화하고, 순박한 정서가 숨 쉬는 고장이다. 한 처녀가 자치샘에 떠오른 오이를 드시고 태기를 갖은 후 낳은 애가 바로 천은 스님이시다. 어머니가 의성이씨신데, 어머니의 성을 받으셔서 의성이씨로 알려졌을 뿐이다.
스님들은 태반이 어머니의 성씨를 내세우신다. 어머니에 그리운 정을 품은 종교가 불교이다. 아버지에 대한 정은 다분히 기독교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다분히 기독교의 그러한 점을 지니고 있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반면에 불교는 12 연기를 여읜 자신의 유전자를 찾는 과정으로 이끄는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너머로, 초의선사도 그러하시고, 천은 스님도 같은 맥락이시다.
*각 스님은 푸른 눈의 벽안이신데, 어떻게 불교에 귀의하셨을까? 앞서 언급했듯 억울한 누명을 벗고자 노력한 과정의 업이셨다. 오스 와일드가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역사에는 오기되었으나, 실상은 묘법연화경처럼 진흙 속에 진리로 오스 와일드였던 *각 스님의 억울함을 부각했다.
민족의 서글픈 한을 품은 스님들은 그렇게 저마다의 사연인 발자취를 남기시고, 무여열반하신 분들이시다. 도래인과 민족의 울분으로 이른 아리랑은 구슬픈 서편제에서 흥겨운 동편제로 이어졌다. 뮤온, 식, 연각, 림포체로 이어온 불교의 맥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품었다.
12 연기를 여의는 길은 RNA도 벗어나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인 DNA를 찾으란 말로 비친다. 십악을 여의고 십선을 행하여 육바라밀의 습을 익힐 때, 자성법문은 열리며,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12 연기에 가린 모습일 뿐이다. 곧, 일체가 다 자기 모습인 부처로 보일 때, 귀빈도 왕도 여읜 본연을 자각하게 된다. 식을 여의고, 아뢰아식까지 여의면, 우주가 그대를 품는다. 마지막 문장은 조심성과 여리박빙의 수행이 필요한 글구다. 처절하고 치열한 수행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혜련 선사 발원문이 겸손한 면만 갖춘다면 보적경에서 이르는 수월한 방편의 수행길이리라!
능가경은 미증유 인연인 자기의 유전자를 찾고 귀의하라는 가르침이다. '능엄경은 모든 것을 부인하시고 반어적으로 가르침을 전하시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에서 접근한 결론은 진공묘용인 우주에 유전자를 영원히 보전하여 발현하시려는 궁극의 테르기술이었다. 석가모니의 팔만대장경은 자신을 찾고, 자신의 유전자를 올바르게 발현하는 길을 이르는, 선각자께서 밝히시는, 강화도 전등사에도 깃들어 있는, 루트이다.
오렌지가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한다. '해 일'자를 밟자 '말씀 왈'자로 된 이치는 스님이 Mock가 아닌, Monk로 왜곡된 이치이리라! 주암호반을 홀로 걷는 야심한 밤길은 하룻강아지 짖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무오해에 시작된 사화는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이어지는 오해와 누명에 대한 해명의 길이었다. 상사화가 하룻강아지와 달리 '논개'께서 품으신 강남콩 꽃보다 짙게 다가온다. '내 손에 창자를 내어 인두에 지지겠다'는 섬듯한 외침인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란 호소는 억울함에 내비친 비장한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