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푸르른 잎이 돋으며 도시가 푸르러지고 있었다. 백두산대폭발 2년이 지나서야 겨울이 끝나고 계절이 돌아왔다. 2년 만의 따스함에 사람들은 모두 패딩을 벗고 길거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꽤나 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뉴스에서는 14구의 사람들이 반팔티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영상을 보도하였다. 무언가 새로운 축제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사하를 무작정 찾아갔던 날 이후부터 나는 영생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겨울은 사람을 생존에만 집착하게 하는 잔인한 계절이었다. 나에게 봄이 오고 나서야 나는 오늘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날부터 사하와 나는 진정한 연인이 된 것 같았다. 그전까지가 가짜 연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진정한’의 반대말은 ‘그저 그런’인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삶에 사하라는 존재가 임계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사하의 존재가 커질수록 나라는 존재도 또렷해졌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사랑을 하면서 영생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랑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잠시의 봄도 빠르게 끝나가고 있었다.
사하는 조형작가이다. 그녀의 대학시절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색색의 비단으로 감싼 공모양의 무엇이 천장에 짚끈으로 묶여있는 설치미술이었다. 전광판에는 매일 그 짚끈의 굵기가 기록되고 있었다. 매일매일 차이는 없지만 1년 전 설치 때보다는 확실히 얇아져 있었다. 언젠가는 끊어질 것이 분명한 짚끈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우리나라의 유교적 모순과 관행 그리고 여성차별이 사라지게 될 것을 물리적 실체로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때야 가능하다. 나는 사하의 작업을 재능이 없는 사람이 실험정신으로 포장한 결과물로 터부시 했다. 사하를 좋아했지만 사하의 미술 작업까지 존중하지는 못했다. 사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저 그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었다.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던 어느 날 나는 사하의 첫 개인전 오프닝 리셉션에 갔었고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하가 첫 개인전을 통해 무언가 이루어내길 바랐고 막연한 응원을 하였었다. 심지어 개인전이 열린 SL갤러리는 3대째 운영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명 갤러리라서 더욱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갤러리에 들어갔을 때 보게 된 건 개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일렬도 전시된 생리대뿐이었다. 그것도 사용한 생리대였다. 너무 충격이라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때의 감정은 당혹스러움을 넘어선 수치스러움에 가까웠다. 사하는 많은 예술 한다는 사람들 무리에 둘러 쌓여있었고 나를 맞이할 새도 없이 바빴었다. 잔뜩 상기된 사하의 얼굴에서 나는 섬뜩하리만큼 멀어져 버린 사하를 보았다. 이 전시가 전혀 이상하지 않고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하는 나와 다른 물리적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아니 사하뿐만이 아니라 이 갤러리 자체가 시공이 없는 실체 같았다.
부자들의 파티에 초대받은 가난한 주인공처럼 나는 초조했다.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건 이 클리셰를 더 지독하게 만드는 내가 안고 있는 큰 장미 꽃다발이었다. 사하는 나와 몇 마디 나눌 새도 없이 바빴고 우리는 겨우 시간을 찾아 과장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사진을 다시 보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그 사진을 볼 용기가 없었다. 그 사진에는 초대받지 않았어야 할 당황한 내가 찍혀있었다.
더욱 기이한 일은 사하의 첫 개인전이 TV에서 왕왕 보도되었기 때문이었다. TV에서 예술 관련 콘텐츠가 보도되는 것이 이례적이라 당황스러웠었다. 나는 그 보도들을 매우 진지하게 모두 찾아보았다. 결국 ‘여성해방’이라는 메시지를 주제로 한 파격적인 전시라고 하였지만 어디서 ‘해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종종 사하를 레지던시에 데려다주곤 했었다. 사하는 그곳에서 이 전시를 준비했었나 보다. 그 과정은 어떠했던 걸까? 나는 그녀와 다른 육지처럼 멀어져 버렸다. 사하를 이해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사하와 철저히 분리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