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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찬우 Oct 03. 2024

조악한 상념의 결괏값

 약 한 달간의 전시가 끝나가던 날 갤러리에서는 RSVP로 진행된 사하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있었다. 미디어에서 화재가 된 전시였기에 꽤 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왔었다고 했다.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젊은 알터 작가라는 상품적 속성과 생리대라는 오브제가 가진 성편향적 요소가 누군가에게는 매력적으로 소비될 가치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아마 더 자극적이고 회자성이 있는 퍼포먼스를 기대하고 모였을 사람들에게 사하는 단체 사진 한 장을 찍는 것으로 퍼포먼스를 마무리하였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 퍼포먼스는 전시 기간 동안의 버즈량을 넘어선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퍼포먼스에서 촬영된 사진 한 장은 그날 밤 100개의 에디션으로 판매되었으며 작품명은 <똥 멍청이들과 함께>였다. 자신의 전시에 호의적인 기사와 보도를 했던 기자들을 모셔서 ‘똥 멍청이들’이라 매도한 이 작품은 1차원적인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전시의 완성체였다. 구매 순서대로 에디션 번호가 차례로 배부되었는데 늦게 구매할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빠른 구매로 당신의 영민함을 증명하세요’


 이상하리만큼 교만하고 거만한 이 카피 또한 배타적 성취감을 자극하였다. 사하의 연인이라서 구매한 것일까, 아니면 전시장에서 느꼈던 패배감을 전복하고 싶은 방어기제였을까? 나는 그 작품을 구매했다. 에디션 97번, 참으로 애매한 숫자였다. 100개의 에디션 중에서 가장 큰 소수이다.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지는 소수에서 묘한 소외와 열등감을 느꼈다.


 왜 사람들은 이 <똥 멍청이들과 함께>라는 작품에 열광한 것일까? 나는 검색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하의 개인전의 생리대는 여성해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전시였었다고 했다. 미술관 혹은 갤러리라고 하는 순백의 공간과 대척점에 있는 ‘불쾌’라는 감정을 가져오기 위한 개념미술이었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가 아닌 예술 그 자체의 철학과 개념에 접근하는 하나의 언어로 진화하는 과정 즉, ‘미술’이라고 하는 ‘기술’이 ‘예술’이라는 ‘언어’로 변화하는 그 자체에 대한 고찰이었다. ‘생리대’라는 오브제에서 1차원적으로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출력한 많은 매체사들을 모이게 하여 < 똥 멍청이들과 함께 >라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불쾌’라는 감정이 전시에서가 아니라 궤변과 농락으로 점철된 이 작품에서 더 크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설득당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최저 시급으로 한 달은 족히 노동해야 할 수준의 가격인 그 작품은 주문이 시작된 그날 밤 판매 완료되었다. 사하가 이루어낸 무언가가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그럴수록 멀게만 느껴졌다. 사하가 똥 멍청이로 매도했음에도 매체들은 퍼포먼스와 에디션 판매 결과를 우호적으로 보도해 주었다.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나는 사하를 만날 수 있었다. 치열하고 바쁜 시간을 보냈을 텐데 마치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사하는 나에게 찾아왔었다.


    “안녕 위대한 영스타”


 말로 안 되는 인사에 사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녕 똥 덩어리”


 ‘영스타’라는 고루한 표현에 복수라도 하듯 사하는 나에게 ‘똥 덩어리’로 받아쳤다.


    “너 내 작품 왜 샀냐? 나 AP 5개 가지고 있는데.”


 소장자 개인정보 공개 필수 조건이었던 터라 사하는 소장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당연히 너의 1호 팬이니까”


    “아이고 그러셨구나. 위대한 영스타가 그걸 몰랐었구나.”


    “근데 AP는 뭐야?”


    “아 그건 에디션 작품의 일정 수량을 작가소장용으로 가질 수 있어.”


    “그렇구나. 어쨌든 이번 전시 잘 된 거 너무 축하해. 멋졌어.”


    “암 암 더 잘돼야지 더 잘돼야지~”


 이상한 멜로디를 붙여 노래하듯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사하에게서 막연했던 거리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하는 늘 같은 곳에 있었을 테다. 나 혼자 잠시 멀리 떠났다 돌아온 것이었다. 전시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던 사하에게서 느꼈던 상실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만의 사하가 모두의 사하가 되더라도 사하에게 나라는 의미는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하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긴장감이 분명 있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불안이었다. 불안이 확실하였다.


 사하와 나를 이어주고 관계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충분하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안의 근원을 찾고 싶었다. 어쩌면 그날의 키스는 나에게 새로운 불안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하가 나에게 한발 가까이 더 다가왔을 때 미련한 나는 또 한발 뒤로 물러섰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나에게 자신감이 부족한 이유 일듯 싶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나에게 자신감이 부족한 것일까?

    

    더 멋진 직업이나 직장을 갖지 못해서?

    영생을 할 수 있을 만큼 재력이 부족해서?


 어찌 보면 대답을 정해두고 질문을 하는 것 마냥 우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충분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거대하고 강한 것이 아니었나?

    그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인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 그녀의 눈이 빛나서?

    아니면 아름다워서?

    꿈에서 흘러나왔던 그 노래를 알고 있는 운명 상대를 만나게 된 상황이 소중해서?


    나는 우리의 만남이 평범하지 않고 운명적이었으며, 그 운명적인 상황 자체를 소중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사하를 회사 동료로 만났어도 사랑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사람이 아닌 상황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사하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난 이기적 이게도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용기 내어 말했다.


    “사하야. 널 너무 많이 사랑해.”


 조악한 상념의 결괏값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 크기가 얼마나 비대해져서 나를 잠식하고 있는지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그리고 사하는 나를 안았다. ‘사랑해’라는 한 마디는 감정의 기폭장치 같았다. 내가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했을 때 그 폭발이 오히려 나를 잠식하고 확실해졌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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