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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찬우 Sep 30. 2024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확실해 질 거라 생각했다. 사하에 대한 막연한 나의 감정과 이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막연해 지는 것 같았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와 나는 단단해 질 거라 생각했지만 한 발 다가갈수록 정확하게 한 발씩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사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항상 나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하의 태도는 어쩌면 이해를 넘어서 있었다.


    내가 부족한 걸까?

    아니면 우리에게 중요한 결핍이 있는 것일까?

    사하와 나는 어떤 미래를 살게 될까?

 

 어느 하나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나의 무지에서 두려움이라는 싹이 피어났다. 이 또한 사랑의 과정이라면 이대로 두어도 되는 걸까?


    나는 사하에게 어떤 존재이고 사하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모든 것이 막연했다.


 토요일 아침. 나는 사하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마치 대단한 임무를 하달 받은 요원처럼 사하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를 만난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더 또렷하게 알 수 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하는 오전 9시30분이면 14구에 있는 작업실로 이동하며 나에게 종종 전화를 하였었다. 오늘도 별일이 없다면 그럴 것이다. 사하의 아파트 앞 제타웨이 승강장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사하를 기다렸다. 사하를 기다리며 망상에 빠져있었다.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꿈꾸었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왜 이동수단은 점점 더 빨라 지는지, 영원의 시간 속에 빠름 이라는 가치는 어떤 의미인가 같은 생각들 이었다.


 사하를 오늘 만날 수 있을까? 만나지 못한다면, 아니 나는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할까? 사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사하는 나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표정은 놀람일까 아니면 반가움일까?

    혹시 화를 내지는 않을까?

    불쾌해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일까?


 꼬리에 꼬리는 무는 잡념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 하늘에서 햇살이 비추었다. 이제는 종종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백두산대폭발 이후의 긴 겨울이 끝나고 있었다. 2년간 얼었던 한강이 녹고 있었다. 그리고 사하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사하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비현실적인 상황인 거 같았다. 사하를 약속 없이 기다려도 사하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서야 사하가 나에게 환영이 아닌 실체로 다가왔다.


 걸어오던 사하는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 짧은 순간 나에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마치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던 금지된 장난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굳어버렸다. 사하가 뛰어와 나를 왈칵 안았다. 그녀는 따뜻했다. 햇살보다 더 따뜻했다.


    “어쩐 일이야? 뭔데 뭔데. 무슨 일이야 도대체”


 처음 보는 사하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해맑은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사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녀도 나를 꽈악 안았다. 따뜻하고 뜨거웠다. 우리의 체온에 얼었던 한강도 녹아버린 것 같았다. 


 사하를 작업실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사하는 나의 팔을 꼬옥 안고 있었다. 쫑알쫑알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작가들의 레지던시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 유망 갤러리에서 러브콜을 받은 옆방 작가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연애 이야기들. 사하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처럼 내 옆에 찰싹 붙어 나를 올려다보며 쉴새 없이 이야기 하였다.


    YK5008 아름다운 눈이다.


    “작업실에 가볼래?”


    “응.”


 사실 거절을 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은 아니었다. 정말 철저하고 완벽한 논거가 있지 않고서야 거절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나는 쉽게 응했다. 물론 나도 사하의 작업실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막연하고 배타적인 공간일 거라는 생각을 해왔던 거 같다. 그리고 그들의 고상한 놀음을 공감할 수 있는 자격 또한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사하의 작업실이 있는 아틀리에14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깔끔한 공간이었다. 그래피티가 있고 히피, 레게 머리를 한 사람들의 소굴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곳은 그저 검정색으로 깨끗하게 도색된 건물이었다. 사하는 신난 아이처럼 내 손을 잡고 건물로 들어갔다. 2층에 있는 사하의 작업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커 보이긴 했지만 양쪽 다 열리는 구조인줄은 몰랐다. 엘리베이터 안은 정말 승용차 2대는 충분히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었다. 화물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2층에 올라간다는 게 너무 어색했다.


    “계단은 없어?”


    “있는데 비상시에만 문이 열려. 사실 계단실에 들어가본 적도 없어.”


    “엘리베이터는 화물용 밖에 없어?”


    “응. 조형 작품이나 대형 평면회화 작업을 옮기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한참의 시간을 어색하게 기다려 사하를 따라 갔다. 어색한 이방인이 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저기 제일 안쪽 방이 내 작업실이야.”


 사하의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낯선 공간에서 잔뜩 소심해진 나는 잠깐만이라도 누가 문을 열고 나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짜잔~ 여기가 내 작업실.”


 사하는 뭔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문을 열자마자 대형 선반에는 용처를 알 수 없는 많은 오브제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따. 가장 끝 방이라 ㄱ자 창 밖으로 도로와 나무들이 보였다. 안쪽으로는 컴퓨터가 있는 큰 책상이 있고, 한 가운데는 덩그러니 3인용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큰 종이에 연필로 많은 설계도 스케치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다. 그런 스케치 조차 없었다면 정말 어떤 1인기업의 회사 사무실 같은 느낌이었을 것 같았다. 


    “너무 깨끗하네.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


    “네 생각은 어땠는데?”


    “음…… 큰 이젤이 있거나… 물감들과 도구들이 어질러져 있고,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가 있고 벽면에는 이상한 이미지들을 붙혀놓은 그런 곳?”


    “아, 여기 작가들 중에도 그런 방들이 있지……”


 사하는 나의 반응에 뭔가 못마땅해 보였다.


    “소파에 앉아봐. 내 작업들 보여줄게.”


 사하는 3D 빔으로 여태까지의 많은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비전문가인 나는 그저 추상이라는 만능 표현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과거의 대형 조형 작업들은 꽤 인상적이었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사하가 자기 보다 큰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멋져 보였다. 물론 저 조형물이 지금의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하가 만들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편애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정말…….”


 난 딱히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구체적인 표현이 사하에게 실례 혹은 실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최근의 작업들을 설명할 때 사하의 눈에서 빛이 났다. 양쪽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개념미술은 이해할 수 없지만 사하는 충분히 나에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사하가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사하의 설명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을 들킨 학생처럼 경직되었다.


    “여기서 키스할래?”


 사하의 이 말에 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가려 했다. 나는 내 심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대충 왼쪽 가슴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하에게 입을 맞추었고 나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느껴졌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복숭아의 속살 보다 부드럽게 그녀의 섬세한 혀가 나에게 왔다. 맛을 느끼고 발음을 만드는 기관인 혀를 나는 처음으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엄청난 이스트에그를 숨겨두었다. 나는 그녀의 혀를 찾아가 느꼈다. 척추가 초콜릿처럼 녹아버렸다. 나의 모든 뼈들이 녹아 사라지고 연체동물의 감각만이 살아남았다. 지구의 중력이 강해지며 소파의 깊숙이 더 깊숙이 내 몸을 잡아 당겼다. 난 이 시간이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그 때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정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시간 나의 감각을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한참을 안고 있었다. 감각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하를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었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녀와 오늘을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낡은 카세트데크를 찾았고 매우 신났었다. 실제로 카세트데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건전지를 구해와서 넣고, 라벨도 없는 카세트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지만 볼륨을 올려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고무벨트 부품이 삭아 끊어져 고장이 났을 거라고 했다. 드라이버로 분해해보니 정말 얇은 검정 고무벨트 하나가 삭아서 끊어져있었다. 어머니의 작은 머리 고무줄 하나를 대충 걸어주고 다시 전원을 켰었다. 할아버지는 기타를 치며 노래한 것을 녹음해 두셨었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 어쩌면 나와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며 그 날의 기억이 났다. 나는 오늘 사하를 만나 몇 십년 만에 전원이 들어온 카세트데크처럼 켜졌다. 그 카세트데크에서는 My Bloody Valentine의 <Only Shallow>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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