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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찬우 Oct 15. 2024

루시드 드림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항이었다. 주위의 외국인들과 일본어에서 해외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공항의 창 밖에는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들이 있었다. 나는 창 밖을 볼 수 있는 리클라이너에 앉아 있었다. 창 아래쪽 환기 시설인지 에어컨 혹은 온풍기 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을 윈도 시트 삼아 한 여성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모든 의자가 창을 향하고 있었고 그 여자 혼자 모두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그 여자는 그런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역광 때문에 쉬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발머리였지만 분명히 사하였다. 꿈속에서도 그녀는 당당하고 예뻤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재빨리 나의 눈을 피하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었다. 황색의 크라프트커버의 노트였다. 그리고 펜을 찾아들고 대기실의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녀와 또다시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듯한 그녀의 시선이 이내 나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노트에 뭔가를 삭삭 그리기 시작했다. 노트와 나를 번갈아 보며 크로키에 집중하고 있었다. 흘깃 그녀를 쳐다보는 나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선택하여 그리고 있었다. 그 선택에서 어떠한 우월감을 느꼈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그녀를 위해 조금은 더 품위 있는 모델이 되려고 했다. 그녀의 크로키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몸은 움직이지 않고 책장만 넘기며 있었다.


 생각보다 그녀가 나를 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며 스케치하는 그녀를 잠깐씩 훔쳐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 드로잉북에 그냥 스케치를 연습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스케치를 찢어서 나에게 선물하려고 하는 걸까?’

    ‘꿈속의 우리는 몇 살일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그녀의 시선은 스케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트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그녀는 아마 나에게 그 스케치를 선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나에게 스케치를 선물할 때 어떤 말이 어색하지 않은지, 그리고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발 한발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그리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는 척해야 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나의 뒤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시간이 남아서 저기 앉아서 그쪽 분을 그려봤는데요, 허락도 없이 그려서 죄송하고 이 그림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나는 책을 든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뒤돌아 보지도 못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훔쳐 들으려고 귀가 뒤통수까지 옮겨갈 정도였다. 


    “아. 그렇군요.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선물 받게 되어서 영광이네요. 잘 간직하겠습니다. 너무 멋진 그림이네요.”


 사하의 스케치를 선물 받은 그 남자는 너무나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그 특이한 말투, 그건 태오였다. 


 그녀가 또각또각 내 옆을 다시 지나쳐 갈 때 나는 옆구리깨를 한칼에 베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태오를 선택하여 그리고 있었던 거였다. 베어버린 그곳에서부터 온몸에 수치심이 차올랐다. 다시 그녀가 앉아 있던 창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모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단지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그녀가 바로 앞에 나를 두고 태오를 그려서는 안 되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걸어가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란 눈의 사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누구신데 이러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과 헷갈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사과밖에 할 수 없었다. 꿈속의 사하는 나를 알지 못했다. 다시 홱 뒤돌아 가는 사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수치심과 모멸감은 사라지고 그저 초라한 나만 우두커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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