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소설 에필로그를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1980년생인 나는 어릴 적부터 신문을 통해 익숙하게 봐왔던 신춘문예라는 등용문을 통해 소설가가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성인이 된다면 꼭 신춘문예에 도전해 보겠다고 다짐했었다. 20살, 대학생 1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하지만 도저히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어떠한 경험치가 없었다. 학교와 집만을 반복했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공대생이었던 나에겐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 어떠한 경험도 없었다. 이별은 고사하고 사랑 한 번 해본 적 없었고 이성의 손을 잡아본 적조차 없었던 내가 쓴 이야기를 읽어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었다. 제목은 ‘K 씨 이야기’,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택시 기사가 감정을 수집하는 이야기였다. 사랑의 감정을 알기 위해 사랑을 하고 이별의 감정을 알기 위해 이별을 하고 결국 살인의 감정을 수집하기 위해 살인자가 되는 단편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나의 한계에 직면했고 다독만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어주지 못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였다. 그리고 18년을 마케터로 직장생활을 이어가다 2024년 이직한 모 대기업을 채 몇 개월 근무하고 자진 퇴사하게 되었다. 나는 번아웃으로 버틸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던 그날의 회의를 마친 나는 사표를 쓰고 회사에서 짐을 싸서 나와버렸다. 말로만 들었던 공황이라는 것을 처음 겪게 되었다.
우선 쉬기로 했다. 이직 전 회사에서 10년 장기근속 1개월 유급휴가조차 반납하고 무식하게 일했던 시간들을 후회했다. 결국 내가 나를 관리하지 못해 나는 18년간의 직장생활에서 처음으로 쉼표를 찍게 되었다. 매일을 알람시계 없이 눈이 떠질 때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매일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를 찾아다녔다. 나의 부캐는 아트컬렉터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주말에 겨우 짬을 내어 찾아봤던 전시를 매일 즐길 수 있었다. 평일 낮의 햇살, 바람 그리고 소리가 참 좋았다. 나는 아내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백수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퇴사 2개월이 지났을 때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이 소중한 자유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한 끝에 내 마음속 창고 구석에 방치했던 소설가의 꿈을 찾아냈다. 20살의 나와했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소설을 쓰는 걸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공모전부터 검색해다. 평소에 선망했던 메이저 출판사의 공모전을 찾아냈다. D-DAY는 정해졌다. 나는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마감일을 설정해 버렸다. 그리고 장편소설을 그날부터 쓰기 시작했다.
첫날은 정말 딱 한 줄을 썼었다. < YK5008 아름다운 모델이다. > 딱 이 한 줄을 써 놓고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어떤 인물들을 배치할지, 그리고 그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무작정 내일은 5줄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그 2배, 그리고 다음날은 또 2배 늘려가다 보니 며칠 만에 워드 몇 페이지를 써갈 수 있었다. 도쿄 겐다이 아트페어에 가기 위해 며칠간의 여행기간을 빼면 매일 도서관에서 글을 썼다. 그렇게 나는 D-DAY에 맞춰 겨우 이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최대한 오탈자를 검수하고 소설을 인쇄하여 출판사 공모전에 등기발송 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당선과 출판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모전의 조건인 200자 원고지 500매 이상의 소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25년이 지나 20살의 나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냈다.
이렇게 쓴 소설이 공모전에 낙선하게 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한 명이라도 내 소설을 읽어주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이 소설이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을까 고민하다 브런치 스토리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다. 브런치 스토리에 작가 신청을 하고 다행히 1 영업일 만에 합격 회신을 받게 되었다.
이 소설은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쉬면서 내가 한 유일한 생산적 활동이다. 그리고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집했던 감정의 일기장이기도 하다. 20살의 내가 써보았던 단편소설의 주인공이었던 K 씨가 수집하고자 했던 감정들을 내가 충분히 소장하게 된 지금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