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은 나에게 너그러운 시기였다. 억지로 학교에 가서 성가신 아이들 틈에서 신경을 곧추세우지 않아도 됐고, 도이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편했다. 공허한 시간들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괜찮았다. 나는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은 떠오르는 그 아이를 지워내지 못하고 일기장에 ‘심도이’ 세 글자를 계속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정성스럽게 적어가면 내 마음이 그 아이에게 전해질까 생각해 봤다. 100번? 아니 그건 너무 부족했다. 1,000번?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 아이의 이름을 1,000번이나 적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질 리 없었다. 누구도 전화를 하지 않는 내 휴대폰에 그 아이의 전화가 온다거나 하는 기적을 바랄 순 없었다. 1,000번을 그 아이의 이름으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일기장들을 넘겨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얼마나 미련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도이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라는 존재가 그 아이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예를 들면 그 아이의 자리와 아주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거나 그런 생각들이었다. 그 아이와 친한 무리들과 함께 친해진다는 건 너무 힘들어 보였다. 방법도 알 수 없었고 친구가 된다는 게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혹은 내가 너무 멋져진다거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나라는 존재를 그 아이가 더 기억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결정했다. 그나마 나에게 소질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암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로 1등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항상 전교 1등을 한다면 도이도 나를 모를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를 그것을 선택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남은 여름방학을 오롯이 공부만 하면서 보내었다. 그 아이가 생각날수록 나는 공부를 했다. 지금의 나의 노력이 그 아이에게 닿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만의 방학을 보내는 동안에도 부모님은 이런 나에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공무원인 두 분과 나는 항상 대화가 부족했다. 물론 다른 가정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만큼 대화를 하지 않기는 힘들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항상 과도한 예를 갖췄고 항상 미소를 지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이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손을 잡고 놀이터에 걸어오던 그 아이를 부러워했다. 아빠와 엄마는 나를 보면 늘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래, 요즘은 무슨 일 없지?”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늘 똑같죠 뭐.”
그러면 부모님도 늘 똑같은 말로 이 짧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하고.”
무슨 일이 있어야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무슨 일이었을까? 우리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고사하고 대화를 하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사실 그것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지금의 생활이 편했다. 사실 편하다는 말은 거짓일 것이다. 편하다 보다는 익숙했다가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나는 이런 생활에 그저 익숙했다.
나에겐 이미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내가 어릴 때 어떤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아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와서 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나는 그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지만 그 아이와 친해지지 못해서 그 아이의 관심을 받고 싶어 이번 여름방학 동안 미친 사람처럼 공부만 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은 이 엄청난 무슨 일을 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더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긴 여름방학이 끝나던 마지막 밤 나는 일기장을 폈다. 잠들기 전 습관처럼 일기장을 펴지만 최근에는 몇 주 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는데, 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그저 교과서와 문제집을 외울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암기에 생각보다 더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 정독한 것들은 웬만해서는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이런 소질은 아마 부모님들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들도 아마 나처럼 큰 노력 없이 남들보다 더 큰 성과를 쉽게 이루었을 것 같았다.
나는 오랜만에 한참을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일기장에 한 줄을 적었다.
“내일이면 그 아이를 볼 수 있다.”
그 한 줄을 쓰고 나니 일기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죽었을 때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부모님이 언젠가 내 일기장을 다른 책들과 함께 버릴 수도 있다. 내가 그 아이의 버려진 그림일기를 훔쳤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의 일기를 보게 된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단지 그 한 줄의 글이 일기장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담스럽게 하였다. 그 한 줄을 지우기만 하면 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이 일기장에는 1,000번을 정성스럽게 쓴 그 아이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넣었다. 썩 마음이 편한 장소는 아니지만 더 좋은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이면 그 아이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