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와 자주 연락을 하였다. 어쩌면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부터 나는 그녀가 나의 여자친구가 되어주길 바랐다. 단 한 번도 이성교제를 해본 적 없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잦은 연락에도 그녀는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내었다.
< 내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카페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나는 그녀의 휴대폰에 메시지를 보냈다. 어떤 답장이 올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어쩌면 거침없는 나에게 빠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네. 내일 오후 7시 괜찮으세요? >
그녀에게서 빠른 답장이 왔다.
< 네! 내일 오후 7시에 만나요 >
나도 빠른 답장을 하였다.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두근거림을 그대로 두어도 될지 싶을 정도였다. 나에게 무언가 처음으로 소중한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 알 한 알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같은 순간들이었다. 나는 내일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백을 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당최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시계만 수없이 바라보았다. 시간은 잔인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잠들어 깨어났을 때 오후 5시 정도가 되길 바랄 정도였다.
나는 시간을 보낼 방법을 알지 못했다. 평범한 일요일이었다면 아마 나는 티브이를 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오늘은 티브이를 켜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오늘 뭐 하셨어요?'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마땅히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가상 모니터를 켜서 회사의 워크넷에 접속했다. 주말에도 회사일로 바빴다고 하는 게 더 괜찮을 것 같았다. 예정에도 없던 회사 업무를 시작했다. 차라리 이게 마음이 편했다.
오후 5시부터 나는 이 옷 저 옷을 꺼내 입어 보았다. 그러고는 결국 하얀 셔츠를 골랐다. 그녀에게 깨끗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허둥대는 내 모습이 못 미더워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래도 괜찮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에게 취해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나는 그동안의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에 있었다.
7시에 맞춰서 나가야 할까, 아니면 일찍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고민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그곳을 난 6시 반에 출발하였다. 나를 채근하는 내 몸이 나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카페 어디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 생각하다. 그녀가 앉았던 창가 자리로 갔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보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겨낼 수 없을 만큼의 초조함이 나를 잠식했다. 비겁하지만 어쩌면 오늘 그녀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나올 수 없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상황과 장면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창을 등지고 돌아 앉았다. 그녀가 2층 계단으로 올라왔을 때 바로 알아보고 싶었다. 그녀를 기다리면서 하릴없이 창 밖을 보고 있는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난 2층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직 7시가 되려면 10분이나 남았기에 그녀 일리 없지만, 내 심장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긴장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계단으로 올라오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YK5008, 아름다운 눈의 그녀였다.
나는 일어서 그녀를 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예요.”
그리고 실답지 못한 웃음을 지었다. 경직된 하관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나네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마주 볼 수 있는 테이블을 눈치로 주며 앉았다. 그녀의 자연스러움에 질투가 났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닌가 보다’
나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지만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저 의자를 빼고 맞은편에 앉으면 되는 건데도 그것 조차 어떠한 연산을 하는 컴퓨터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 의자를 뒤로 빼낸다. 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앞으로 당겨 앉는다’
그녀는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그래도 된다고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보고 싶었어요.”
내가 한 말이지만 나도 깜짝 놀랐다. 나는 이런 말을 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말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나는 사실 이성적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선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봤지만 나는 연산이 되지 않았다. 대충 좋은 상황인 것 같았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중심에 그녀가 들어왔다. 이 세상에 그녀와 나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나는 회로가 불탄 기계처럼 아득했다. 그녀와 많은 말들을 하였지만 나는 정확하게는 기억할 수 없었다. 사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부끄러운 나의 질문과 실수투성이의 대답들을 다시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곳에서의 대화들을 포장지로 예쁘게 감싸 기억의 상자 깊숙이 밀봉해 버렸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내가 조금 더 신중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솔직했다. 그저 내 안의 소리를 말할 뿐이었다.
“그래요. 근데 이거 고백은 아니죠?”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로 어떤 실수라도 할 수 있는 비이성적인 나를 나무라는 듯한 엄중한 눈빛이었다. 나 역시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지만, ‘그래요’라는 긍정의 답변에 이미 나는 잔뜩 고취되어 있었다.
“사실 고백 맞습니다. 저는 지금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세상에는 더 멋진 말과 유용한 표현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멋진 말을 하지 못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나는 다시 똑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멋진 말을 유려하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상냥함이 사라진 얼굴의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입술을 삐죽 올리더니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것은 분명한 긍정의 표현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해요’라는 말을 여러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이 대답은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었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뻔했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이 이 말을 잡아챘다. 나는 그저 헤벌쭉 웃어버렸다. 그리고 머리의 회로는 기능을 멈춰버렸다. 경험해보지 못한 과도한 연산량에 뇌가 절전모드로 전환된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실없이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도대체 나란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어이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색한 고백을 하고 헤벌쭉 웃고 있는 나를 누가 봐도 어딘가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고마워서요. 이 시간이 너무 고마워서요.”
마지막 이성이 가까스로 잡아두었던 감사의 표현을 결국 나는 해버렸다.
‘고백을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웃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련하게도 나는 그녀에게 오늘 고백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고백을 했고 그녀가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청소를 완료한 로봇 청소기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우리 이제 일어날까요?”
그녀는 나의 회복을 충분히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아니었을까?
“네……”
나는 전혀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나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기 때문이다.
카페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미웠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조차 어색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앞서 가던 그녀가 뒤돌아 나를 보았다.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페를 나와 그녀가 나를 마주 보고 섰다. ‘날씨가 참 춥네요.’라고 말할 뻔했다. 백두산대폭발로 2년째 겨울날씨인데 뜬금없이 날씨가 춥다는 표현은 나를 더 바보 같아 보이게 했을 테다.
“우리 손 잡아 볼래요?”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가늘고 매끄러웠다. 그녀의 체온이 내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제타웨이역 방향으로 걸었다. 그 길이 얼마든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 입구에서 그녀가 내 손을 놓았다.
“그러면 또 봐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돌아서 갔다. 나는 순간 고개 숙여 인사를 할뻔했다. 그래도 다행히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녀와 이곳까지 걸어오며 나의 이성은 어느 정도 휴식을 가졌나 보다. 그녀가 사라진 그곳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박한 나의 용기에 대한 과분한 포상 같은 그녀의 손 내음이 내 손에 남아있었다.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래요. 꼭 또 봐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가 카페 계단으로 올라왔던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복기했다. 다시 떠올리기 부끄러운 말들과 순간들조차도 그저 감사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라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전에 입술을 삐죽 올렸던 것을 기억했다. 아마도 그건 ‘썩 내키지는 않지만’이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집착하자 들떠 있던 나는 불안해졌다. 오늘의 구두 약속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2058년 5월 12일, 모든 것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고 있었다. 숨어있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시나리오 같은 이 상황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