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반공학계열인 서울3대학을 G6까지 수료하였다. 과거에는 대학에 졸업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사회보장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조건인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마치면 많은 사람들이 대학입학에 도전해야 한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 만으로도 사회신용등급에 매우 유리할뿐더러 대학생은 사회보장기금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목표는 오로지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글로벌컬리지연합에 소속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혹독한 사교육의 시간들을 버텨내며 나는 글로벌컬리지연합의 인증 대학에 입학하였다. 부모님은 생명공학계열학과인 서울2대학에 입학하길 바랐지만 나의 점수는 2대학을 입학하기에 부족하였다.
대학에서 G1에서 G15까지의 등급을 인증 받는 과정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회사의 입사 조건인 G5를 수료하였을 때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었다. 그 또한 시작일뿐임을 몰랐었다.
나는 글로벌유통사인 덴스넷의 자회사인 덴스홈 코리아에 입사하였다. 덴스홈은 폐기물로 모듈하우스를 제작하는 회사로 주로 속칭 장외지구 사람들이 구매하고 거주하는 모듈하우스를 생산 유통하였다. 덴스홈은 이 분야의 독과점 기업이라 앞으로도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것 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덴스홈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어떤 회사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회사에 합격하였을 때 부모님은 내 명의로 50m2의 집을 사주셔서 약 6m2 의 대지지분을 가지게 되었다. 3구는 부동산 가격이 높은 지구라 어쩌면 누군가는 부러워할 것같다. 하지만 내가 이 집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영생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나의 생활비로도 부족한 자본소득이 발생할 규모였다. 물론 나의 노력 없이 증여 받은 재산이라 감사한 마음이지만 영생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체신체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 영원히 살게 되지만 말이다.
영생류(永生類), ‘호모 인피니티’의 시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돈이 필요하다. 내가 영생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영원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와버렸고 나는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나는 돈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을 할 뿐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영원해졌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설명하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이다.
기업에는 언제든 계약을 종료할 수 있는 정년을 초과한 구성원이 매우 많았지만, 정년 70세라는 사회적 합의는 변하지 않았다. 기업에서도 합법적으로 구성원을 퇴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소득이 소비를 초과하는 구조가 완성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영생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나는 과연 언제까지 노동자본을 축적할 것이고 얼마의 금액이 될지 계산할 수 없었다. 70세가 되어도 사회보장기금의 연금으로 서울의 외곽에서는 살 수 있고, 특정 국가로 이민을 가게 된다면 충분히 그럭저럭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육신의 기능이 다하게 되었을 때 대체신체를 구매할 수 없다면 그렇게 나는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터를 거부하였었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 숭고하게 죽을 권리를 주장하였지만 충분한 자산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터를 선택하였다. 평균임금으로는 적어도 30년은 모아야 알터를 구매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살아있는 동안 알터를 구매하기 위해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앞으로의 일을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알터의 가격이 지금의 평균임금 대비 인하될지, 아니면 더 비싸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국가병원에서 알터를 제공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국가에 필요한 정신이라면 영원히 살리어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신이 나일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어떤 의미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기업의 목적 또한 영생이다. 가끔 기업가는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될 때 많다. 이미 영생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자본소득을 발생시킬 수 있을 텐데 기업을 운영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 내가 저 만큼의 자본이 있다면 나는 기업을 운영했을까? 아니면 그냥 평생 자본소득으로 생존하였을까? 영생할 수 없는 자들이 기업의 영생을 목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했다.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내가 지금의 회사에서 임원급 이상이 된다면 어쩌면 영생할 수 있는 자본의 규모를 축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임원이 되었던 사람들은 나의 연차 때 어떤 생각으로 일하였을까? 어쩌면 기업은 영생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어느 정도는 늘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직 선택 받은 자들을.
아마 선택 받은 자들은 사하가 말했던 이기는 게임을 치열하게 해왔는지도 모른다. 내 자신감의 부재는 아마 그 이기는 게임을 회피한 결과이고 결국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장외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40구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을 장외인이라 불렀다. 물론 물리적인 장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장벽 밖의 사람들’ 이라는 의미로 대부분 사회보장기금으로 생활하고 주로 온라인으로만 세상과 소통했다.
미디어에서는 장외인을 포함하여 어떠한 지역 차별적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장외인 출신 성공 사업가의 인터뷰에서는 장외인 출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차별적 언어를 사용할 수 없지만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즉, 그 지역을 벗어난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체가 폭력적인 패러독스였다.
서울 중심 10구를 사람들은 ‘센트럴10’이라 하였고 보통 ‘센텐’이라고 부른다. 나는 성인이 되면서 센텐에 입성했고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장 잘 따라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생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인간은 죽음을 당연히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움인 시대가 왔다.
계속 살아가지 못한다는 두려움. 과거의 사람들은 죽음이 당연하였기에 죽기 전에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였을 테다. 인간의 욕동은 리비도가 아니라 죽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결국 똑같은 건가? ‘죽기 전에’라는 패러다임이 ‘죽지 않게’로 전환 된 건가. 결국 인간의 욕동이 ‘죽음’인 것은 똑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