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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찬우 Sep 25. 2024

햄스터

 다음 날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의 일들을 반추했다. 꿈이 아니었다. 어제의 일들은 모두 실제였다. 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사실이 그저 대견하고 기뻤다. 세수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어제 아침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그녀에게 연락한다면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그녀와 자주 연락을 해왔었지만, 언제 어떤 연락을 하는 게 적절한지 조심스러웠다. 망설임 끝에 나는 오답에 다다랐다. 나를 연락을 하지 못할 상황으로 설정해 버렸다. 나는 평소에 나가지 않던 회사로 출근하기로 했다. 제타웨이를 타고 2구의 회사로 출근했다. 1구에 살고 있는 그녀와 조금은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몇 주 만에 출근한 회사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자리에 앉았다. 어제 괜히 일을 미리 해버린 탓일까, 급하게 할 일이 없었다. 창 밖을 바라보며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길 바랐다.


 주위에 직원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흘깃 훔쳐보았다. 저 사람은 왜 회사에 나와 있을까? 저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을까?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물론 절대로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일을 시작했다. 퇴근하면서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햄스터를 가방에 넣어 몰래 학교에 데려온 아이처럼 나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일했다. 오늘은 빠른 퇴근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후 4시 정도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는 벌떡 일어나 통화부스로 빠르게 걸어갔다.


    “통화 괜찮으세요? 업무 중이시죠?”


    “아, 괜찮아요. 오늘은 회사로 출근했어요.”


    “바쁘신데 전화한 건 아니죠?”


    “정말 괜찮아요. 곧 퇴근하려고 했어요.”


    “네. 그냥 전화했어요. 뭐 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전화했어요’라는 그녀의 말에 부끄러워졌다. 나처럼 연락을 망설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언제 연락하는 게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그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하씨는 오늘 뭐 하셨어요?”


    “우리 동갑인데 이제 말 편하게 해요.”


 그녀는 나와의 통화가 편해 보였다. 나도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응, 그래.”


 말을 놓는 게 어색했지만 소중한 이 통화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야 뭐 늘 똑같아. 평일엔 레지던시에 있어. 아직도 작업실에 있고. 우리 언제 또 보나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가 ‘우리’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그 말이 지금까지의 긴장을 사라지게 했다.


    “아, 주말에 한강에서 서울 레이저쇼 볼까?”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본 적 있어?”


 어떤 의미인지 모를 그녀의 말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없어. 오늘 제타웨이 타고 오다가 광고를 봤어. 이번 주말에 한다고 하더라고. 넌 봤어?”


    “아니. 나도 본 적 없어. 그러면 첫 데이트로 서울 레이저쇼를 생각한 거야?”


 여전히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테스트 같은 질문이었다. 나의 대답이 그녀가 원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생각해 뒀던 건 아니고, 사실 정하지 못했어.”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이 말에 실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음…… 그럼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야?”


 그녀의 ‘진짜’라는 표현이 무서웠다. 서울 레이저쇼는 ‘가짜’가 아니었다. 나는 서울 레이저쇼의 광고를 보면서 그녀와 같이 보면 좋겠다고 정말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진짜 내가 원하는 거? 사실 모르겠어. 진짜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이라도 널 보고 싶어.”


 정답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추궁에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버렸다. 눈치를 보며 가방 속에 숨겨뒀던 햄스터가 허락 없이 가방 밖으로 나와버렸다.


    “듣기 좋네. 뭘 할지는 만나서 생각하면 되는 거지. 뭘 생각해 두고 그래. 근데 나 오늘은 늦을 거 같아. 내일은 어때?”


    “좋아. 언제든 좋아.”


    “응. 그러면 내일 전화할게. 아니다, 언제든 전화할게.”


    “응. 고마워.”


 나는 또 고맙다는 말을 했다. 부끄럽지 않았다.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먼저 전화를 준 것도 고마웠고, 언제든 전화한다고 했던 말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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