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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 Dec 18. 2023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

자존감과 자신감, 최선과 미련

"No match"


올해 초, 의대 불합격을 알리는 두 단어였다. 열심히 달리고 있던 내게 급제동이 걸렸고 그 바람에 중심을 잃어 넘어져버린 3월이었다. 아직 의대를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길도 꽤나 험난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을 배우러 가는 곳이니 당연히 어려워야 하는 것이 맞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학점, 시험 점수, 교외활동, 연구활동 등등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대학을 다니며 모든 것을 이루려니 그 중압감이 많이 컸었다.


MCAT이라 불리는 미국 의대 입시시험은 총 4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으며 중간중간 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7시간이 넘어가는 시험이다. 난 이 시험을 세 번 봤다. 비록 MCAT은 1년에 여러 번 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보통 다시 치르기까지 공부를 좀 더 하며 텀을 두기도 하고 시험 시간도 거의 수능 시간과 맞먹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나 삼수했다고 한 적이 있다.


코로나로 인해 병원 봉사 같은 교외활동들이 다 취소되어 어쩔 수 없이 예상보다 일찍 시작하게 된 첫 MCAT공부는 실패로 돌아갔다. 보통 자연과학 전공으로 학부를 들어가면 MCAT에 나오는 과학 과목의 대부분을 학부 3학년이 끝날 때쯤 모두 배운다. 하지만 첫 시험 준비 때 나는 3학년을 시작하기도 전이었고, 공부 스케줄도 전략도 제대로 짜지 못해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은 걸 깨달은 건 시험 일주일 전, 시험을 취소할 수 있는 기한이 이미 지나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비우고 시험장에 들어가 첫 MCAT의 7시간 반을 보내고 시험장에서 나오기 전 맨 마지막 문항인 "본 시험을 무효화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Yes"를 클릭하고 나온다.


미국 의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불문율 같은 것인데 MCAT시험은 한 개의 죽 쑨 점수에서 그다음 시험에 특출 나게 잘 본 점수로 개선되는 것보다, 그냥 한 개의 어느 정도 잘 본 시험 점수를 의대들이 훨씬 선호한다는 공식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있지 않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의학에선 실수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료계에서 실수란 사람의 생명의 위협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의대를 준비하는 그 순간부터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아직 도전하지 말라는 은연중의 메세지라 추측한다. 내가 첫 시험을 기록에 남지 않게 무효화한 이유다.


첫 번째 시험은 마음을 비우고 치른 시험이었기에 좌절감은 크진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시험에선 넘어야 할 언덕이 조금 컸었다. 이미 한 번 치러본 시험을 3학년이 끝나고 봤었고, 공부 스케줄과 전략 또한 전보단 체계적으로 짜서 봤던 시험이었기에 전보다는 자신감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시험 점수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시험을 보고 나온 후 예상해 둔 점수대가 있었기에 더욱 허탈한 느낌이 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때 의대 진학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었다. 의대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계획을 조금 틀어 좀 더 천천히 가게 되는 방향으로 키를 잡아야 했다. 결국엔 한 개의 시험 점수가 아닌 두 개의 시험 점수가 남게 되겠지만 어쩌겠나. 다음 시험에 내 최대한을, 최선을 다해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달 후, 다시 한번 열심히 준비해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온 후 들었던 생각은 말 그대로 "하얗게 불태웠다"였다. 세 번의 준비기간을 거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어떤 점수가 나오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얻은 점수는 두 번째보다는 올랐지만 크게 의미 있는 점수 향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 시험과 다르게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정말 모든 걸 쏟아부었었고 이보다 더 잘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수 자체는 조금 아쉬웠지만 미련은 남지 않았다. 


"최선"


이것이 내가 두 번째에서 좌절했지만 한 번 더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동기지 않았나 싶다. 두 번째 시험에선 아직 개선할 수 있는 점들이 남아 있었고, 마지막에선, 내 기준으로, 더 잘할 수 있는 요소들이 보이지 않았다. 결과에 만족할 수 있다는 건 최선을 다했단 뜻이고 미련이 남지 않는단 뜻일 것이다.


의대 첫 도전도 떨어진 후에 되돌아보니 처음 MCAT을 대했던 마음가짐과 비슷한 마인셋으로 대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MCAT을 준비하면서 했던 실수로부터 배웠다면 애초에 준비를 완벽히 한 후에 지원을 하는 게 맞았지만 그때 당시엔 내 머릿속에 있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던 첫 시도였기에 실패해 고꾸라졌을 때에도 실망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했고 100%를 쏟아붓지 못했다. 그때 썼던 일기를 발췌해 보면 그때 내 감정이 아직도 잘 보인다.



2023/03/05


나는 변화라는 것이 싫었고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인생은 안정보단 불확실성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변화와 실패의 연속에서 다듬어진 내공 덕분일까. 나는 이제 옛날과 비교해 불확실성과 실패를 대하는 모습에서 좌절하는 모습과 답답해하는 모습이 많이 없어졌다. 급할 것 없다는 마음가짐,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마음가짐, 나를 비교할 대상은 타인이 아닌 내 과거의 자신이라는 마음가짐, 그리고 실패는 되려 인생 경험치를 더 쌓을 수 있는 기회라는 마음가짐 등이 나를 그동안 단단하게 키워왔다.

불합격 통보 이후 많은 주변 친구들이 겉치레 위로 대신 같이 놀자는 면목으로 날 불러내서 최대한 내 생각을 분산시켜 주려 노력해 주는 모습을 통해 한 번 더 나는 인복 하나는 정말 넘쳐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고맙고 너희들을 통해 많이 배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잠시만, 정말 잠시동안만, 내 밭 끝 앞에서 닫혀진 문을 원망해보고 싶다. 이 감정은 며칠간 평소보단 조금 자주 내쉴 한숨에 모두 새어나가길.

재도전의 길의 첫 발걸음은 어느 방향으로 키를 잡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디서 어떤 일을 혹은 어떤 공부를 할지 넘쳐나는 선택지 속에서 찾아내는 방향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더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길 바라본다.




저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된 계기는 별거 없다. 남들 모두 그러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질문과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을 나 스스로 혹은 주변의 도움으로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항상 격려를 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조금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내가 했던 방법은 스스로에게 "OO아, 너 잘하고 있어"라고 되뇌이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몇몇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실패와 실수에 관해 관대한 반면 스스로에겐 엄격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남들에게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고 달려가다 넘어질 수도 있지. 너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 줄 수 있다면, 당연히 그 말을 자신에게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나는 대학교 때 깨달았고 이렇게 자신에게 끝없이 응원을 보내주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자존감이 올라가고 자신감이 생긴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고 이후에 닥치는 고난들도 기꺼이 맞설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험난한 의대의 길을 재도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 도전에서는 비록 시험점수에 만족하고 학점을 잘 따놨어도 교외 활동, 연구활동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자소서에 쓸 얘깃거리가 많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던 첫 시도에서 1차 서류 통과 후 2차 면접까지 갈 수 있었기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고 나를 격려해 줬다. 하지만 당연히 중학교 때부터 꿈꿔왔던 길을 한 번만에 포기하기엔 내가 미련이 남을 것 같았고 경험을 더 쌓고 다음번 시도에야말로 "이 정도면 선방했어"가 아닌 "이보다 더 잘 준비할 순 없었어"라는 말이 나오도록 내 모든 걸 쏟아부어보고 싶다.


내 MCAT점수가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최선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여기에 간절함까지 더해지면 좋지 않은 결과에 상실감 역시 비례해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갈고닦았는데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럴 운명이었는가 보다 하고 넘기고 최선을 다한 나의 공을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 과정 속에서 분명히 많이 배우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 하나의 실패가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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