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진다는 게 항상 나쁜 걸까?
MBTI 파워 J인 나는 어떤 일을 하던지 계획을 미리 세우고 행하는 편이다. 가까운 일은 조금 구체적으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은 대강 계획을 세워둔다. 하지만 제목 그대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작 20 몇 년 밖에 살아보지 않았지만 나도 인생이 계획대로 된 적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 3학년 프랑스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4년을 지냈던 것부터, 중학생 때 외고를 준비하다 실패한 것, 덤덤히 일반고에 가서 내신 열심히 해서 수능 잘 보자라 마음먹었던 내 결심이 무색하게 아버지의 미국 발령으로 인해 또다시 시작하게 된 타지생활, 매주 적어도 2번은 헬스장 가야지가 작심삼일이 되었던 경험 등등. 지금까지 내가 계획했던 일들 중에 가장 잘 이루어졌던 건 아마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한 술 약속들인 것 같다.
작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대를 지원하는 과정 중에 가정의학과 Medical assistant (MA)로 일을 했었다. 나름대로 의대 지원 포트폴리오에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첫 번째 의대를 향한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1년 동안 Medical assistant로 일하면서 소중하고 값진 경험들을 많이 했기에 다음에 재도전할 때까지 한 번 더 MA로 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정의학과 MA로 일하며 동시에 느꼈던 건 1차 의료 쪽은 내 길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번엔 1차 의료가 아닌 다른 분야의 MA로 일해보려 알아보고 있었고, 그렇게 이력서를 열심히 넣던 도중 한 의사분과 만나서 직접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중학교 때부터 나는 병리학 분야로 가고 싶었다. 영어로 pathology라고 하는 이 분야는 보통 우리가 의사 얘기할 때 떠오르는 수술하는 의사들과는 달리 주로 실험실에서 생활한다. 환자분들과 직접적으로 대하기보단 환자들의 장기 조직, 혈액들과 지내(?)며 병의 진단을 하는 분야이다. 이번에 만나 얘기를 나눈 의사분도 병리학자셨다. 그분께 내 첫 의대를 향한 시도를 읊어드린 후 돌아온 대답은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병리학자로서, 네가 병리학에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워. 그런데 네가 저번 의대 자소서에 병리학에 관심 있다고 썼다고 했잖아. 그거 빼. 지금 미국 의대 트렌드는 1차 의료에 집중하고 있어, 특히 코로나19 이래로. 그래서 많은 의대들이 1차 의료 쪽으로 세부전공 하고 싶어 하는 의대생들을 원해. 네가 자소서에 병리학을 하고 싶다고 쓰면 너는 벌써 1차 의료에 중점을 두고 있는 많은 의대에서 걸러지는 거야. 전략적이어야지 의대 붙으려면. 그리고 지금으로선 너 MA로 일하는 것도 다음 의대 지원에 도움 안돼. 내가 다른 길 몇 가지 알려줄게 들어봐."
사실 나는 내 인생에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사람들한테 "네가 뭔데?" 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미래에 되고자 하는 의사, 그것도 현직 병리학자였기 때문에 새겨들을 수밖에 없었다. 병리학자가 병리학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병리학을 하고 싶다고 쓰지 말라는 그 말. 말문이 막혔다. 이 험악하고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의대만큼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하는 곳에서는 진심이 통할 줄 알았지만, 결국엔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하나의 입시과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생각에 실망감이 너무 컸다. 게다가 내가 계획해 왔던 MA의 길이 의대 지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지금까지 구상했던 계획이 전부 부정당하는 느낌이라 중학교 때 이래로 처음으로 의대란 길에 회의감이 참 많이 들었다. 내가 24살 먹을 때 까지도 참 순진했었구나라는 생각 역시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길을 말 한마디로 포기하기엔 너무 허무했고 내가 계획했던 길과는 다른 길로라도 의대에 재도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것이 병리학자 분께서 알려주신 길들 중에 하나인 대학병원 교수님 연구소의 research assistant (RA), 연구 보조사이다 (유사 대학원생). 학부생 때 연구 관련 수업을 많이 들어봤고 교수님 실험실에서 실험보조 알바로 뛰어본 경험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구보단 MA가 더 의대 진학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었지만 현직 의사의 생각은 달랐고 그렇게 새로운 길을 찾아서 나아가는 나는 정말로 곧 대학병원 암 연구실 보조사로 취업한다.
이렇게 보면 내가 내 스스로 짜왔던 계획이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이 병리학자분의 가이드 없이 그대로 진행했다면 정말로 내 추후 의대 지원에 불이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MA를 준비하던 내 마음보다 RA로 취업하고 일하게 될 거란 마음에 더 가슴이 뛴다. 그리고 초반부에 적었던 의도치 않은 해외생활들 역시 힘들었다 하지만 남들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어 하는 해외 생활을 나는 아버지 덕에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해본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험이고, 그 덕에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이 모든 점을 생각하면 내 의도,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 내게 이익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처럼 계획이 틀어졌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나 스스로 멘탈 훈련이라 칭하는 세뇌를 많이 한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 개개인은 자신만의 길,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고, 계획이 틀어져 달라진 길을 간다 해도 늦어진 것이 아니며 그 길이 본래 자신이 걸어가야 했을 길이라고 내 자신에게 힘들 때마다 항상 되뇌인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도움이 많이 된다. 이제 한창 대학 졸업하고 취준/대학원/사업 등 각자 나름대로 치열하게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을 우리 나이 또래 청춘들에게 언제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