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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곰 Apr 25. 2024

교토여행 5일 차, 다시 지옥을 마주하다.

낭만적 여행과 그 후의 일상.

 여행은 이를테면 아주 정당하고 이상적인 회피의 일종이다. 연차를 내고 여행을 가는 것은 당당하게 회피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회피도 이렇게 열심히 한다. 이왕 회피하는 마당에 가장 행복했으면 좋겠고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으면 좋겠고 책을 읽고 브이로그도 찍고 만족할만한 글도 나왔으면 좋겠다. 일종의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다. 완벽주의자라는 말은 다른 -주의자처럼 고집 있어 보이진 않는다. 완벽이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내가 이러한 기질을 갖게 된 데에는 지나치게 모범생이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재수 없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나름 사춘기가 있었다 생각했지만 늘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열심히 해야만 안심이 되는 기질이 남아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의 등수와는 상관없이 엄마의 등살에 학원에 앉아있던 내 나이 언저리의 모두는 그 완벽함 속에서 늘 미완이 두렵지 않을까. 일이 제대로 진행되어도 왜 미리 하지 못했을까 아쉽고, 진행되지 않은 일은 빨리 해야 할 것 같아서 초조하고. 그런 아쉽고 초조한 마음들은 마땅한 피드백과 당면한 부탁을 회피하고 싶게 만든다.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오늘도 계약기간이 마감된 이미지 사용을 알리는 메일을 쓰는데, 사실 며칠간 나의 투두리스트에 있었지만 우선순위에 밀렸던 일이었다. 오늘이 마감 당일이었는데 쫓기는 마음에 메일을 쓰며 왜 미리 쓰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알람을 해줘서 고맙다는 메일. 누군가는 나에게 고마워할 일을 나는 나를 미워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집착적으로 행복을 찾으려던 나를 발견하며,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몰랐던 과거의 나에게 도망치고자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손이 새까매지는 것도 모르고 온갖 땅을 헤집고 다녔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결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만큼이나 얻었으니 후회는 단 하나도 없지만, 다만 이제는 손도 씻고 쉬어야 할 때가 아닐까, 조금 내려놓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적은 모든 일을 오늘 끝내지 않아도 괜찮아, 오늘 적은 것이라고 내일 적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내가 아는 나는 재촉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해내는 사람이니까. 그건 회피가 아니라 회유하는 것뿐이야.


 맘 잡고 회피한 여행 이후 그렇게 경계하던 회피의 순간들이 흐려졌다. 낭만적 여행은 가장 현실적으로 낭만적일 수 있는 일상을 불러일으켰다.


컨설팅을 소개받아 성향 테스트를 해봤다. 예상보다 자존감이 낮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스로 이렇게 만족하는데 자존감이란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혹시 컨설팅 수업을 유료 연장하기 위해 부족함을 더 부각하는 걸까. 순간의 당황은 잠시, 컨설턴트보다는 내가 더 나를 잘 안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히 예전보다 나를 사랑하고, 스스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달라졌고 여전히 달라지는 과정에 있다. 그래도 이 컨설팅으로 인해서 내가 어쩌면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력투구 중인가 하고. 다시 중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터닝포인트가 되어 감사했다. 인생이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은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가는 게 아니라 중간의 균형을 찾는 순간이다. 시합이 아니라 수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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