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혼자여도 좋고, 함께면 더 좋다.
원래 오늘은 ‘래현 투어’가 예정된 날이었다.
주말에는 필수 프로그램이 없어서
개인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토요일에는 래현 투어가,
일요일에는 한라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등산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나는
래현 투어만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여기서 또 같은 실수(=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것...)를 하는 바람에
오늘도 한참 늦게 일어나버렸다.
꼭 가야 하는 일정은 아니었지만
가겠다고 투표까지 한 상황이었고,
인원 수에 맞춰 미리 예약도 해둔 터라
갑자기 취소하는 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합류하겠다고 했지만
차가 없는 나는 서귀포로 나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며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침대와 한 몸이 된 채 누워 있는데,
룸메 연주가 다가와
"언니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밖에 봐봐.
오늘 제주 날씨가 너무 예뻐."라고 말했다.
벌떡 일어나 창밖을 보았더니
말 그대로 완벽한 날씨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날에 가만히 시간을 허비하는 건 유죄인데.
알면서도 한 번 떨어진 체력은 쉽게 올라오지 않았고,
회복할 시간을 주지도 않았으니
오전이 되면 몸이 천근만근이 된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무리해서 새벽까지 깨어 있을 일도 없었을 거다.
설령 그런 날이 한 번 있었다 해도
두 번, 세 번 연달아 술을 마시진 않았을 텐데.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게,
그들의 생각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 재미있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건
제주도라는 지역이 주는 설렘과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다는 신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래현 투어는 저녁 불꽃놀이 시간에
합류하기로 했고,
그때까지 나는 밥을 먹어야 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첫째 날부터 눈여겨보았던
‘산방산접짝뼈 앤 돌우럭’으로 향했다.
메뉴판에 고사리 육개장이 있는 것을 보고
한 번은 꼭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게 된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제주 날씨에 먹는 혼밥이라니.
말 그대로 낭만 치사량.
나는 혼밥을 전혀 싫어하지 않고,
때로는 혼자 밥을 먹고 싶을 만큼
혼밥이 주는 매력을 잘 알고 있다.
우선 나는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이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을 때는
속도를 맞추느라 급하게 먹거나
다 먹지 못하고 남기는 일이 많다.
하지만 혼자 먹을 때는
내 속도대로 천천히 먹을 수 있고,
중간에 다른 생각을 하거나 쉬어가도 괜찮아서
‘밥을 먹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다만 매번 혼자 먹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내내 함께 먹다가
가끔씩 혼자 먹는 시간이 있는 것이
건강에도, 생각 정리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사리 해장국이 나왔다.
나는 고사리 해장국이라고 해서
‘고사리 육개장’ 같은 비주얼을 떠올렸는데,
실제로는 육개장 혹은 닭개장을 닮은 국물에
고사리가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더 좋았다.
나는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숙주 등
나물로 무쳐 먹는 것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고사리 해장국 속 고사리는 억세지도 않고 부드러워서
어젯밤 들이켰던 맥주들에게 사죄하는 기분으로
속을 든든하게 풀 수 있어 좋았다.
홀로 해장국을 맛있게 먹은 뒤 본 하모 해변의 모습.
버킷 제주에서 묵은 뒤로 내내 보아온 하모 해변이지만
오늘의 바다는 정말 역대급으로 예뻤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가을 하늘 특유의 연한 하늘색이 어우러진 풍경이라니.
이런 건 정말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운이 좋아야만 만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버킷 제주에서 지냈던 친구가
모슬포항 근처는 날씨도 흐리고 별로라고 해서
사실 겁을 잔뜩 먹고 오기도 했는데,
내가 온 이후로는 내내 날씨가 좋아서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죽하면 저녁을 먹고 바깥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는 것이 하루의 루틴이 되어버렸을까.
다들 외부 일정을 가거나
개인 일정을 떠나 조용해진 제주 버킷.
내가 온 이후로는 30명이 지내고 있어서
아무리 늦은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도
항상 한두 명은 있었는데,
주말 늦은 점심이 되자 다들 제주를 즐기러 나가버리고
적막한 분위기만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제주 버킷.
우리가 떠나고 나면
아마도 한동안 이렇게 조용한 모습이겠지.
나는 짙어져 가는 가을 앞에서
벌써부터 가을을 타는 듯한 마음으로
조용한 제주 버킷을 사진으로 남기며
약간 센치해진 기분을 한껏 만끽했다.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둘이서 카페를 다녀왔다는 은서와 명숙이도 돌아오고,
다른 일정으로 바깥에 다녀왔다는
정범 오빠도 들어왔다.
서귀포까지 축제를 보러 가야 해서
차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정범 오빠가 렌트를 해온 덕분에
혹시 함께 갈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니
함께 가자고 해주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서귀포로 향하는 길.
오전부터 렌트를 하러 일찍 일어나
공항 근처까지 다녀왔다는
정범이 오빠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5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함께 가자고 하길 잘한걸까
잠깐 고민이 스쳤지만,
정범이 오빠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해주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차에 몸을 실었다.
50분 동안 서귀포로 향하는 사이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다.
가을이라 해가 금세 자리를
달에게 내어주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 덕분에 야자수를 밝히고 있는 조명을
온전히 즐길 수 있어 좋았다.
나와 명숙이, 은서, 정범 오빠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로 저녁을 먹지 않고
곧바로 불꽃 축제 장소로 향했지만,
막상 차에서 내리고 보니
슬슬 출출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출출함을 달랠 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며 걷는데
때마침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우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곧장 다가가
길거리 음식 중 근본이라고 볼 수 있는 오뎅을 먹었다.
밖에서 나눠 먹는 오뎅이라니.
이것조차 낭만이었다.
우리는 차 안에서도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를 알아간다고 해서 꼭 거창한 이야기,
외교 문제나 환경 문제 같은 깊은 주제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게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방을 쓰는 명숙이도,
성격 좋은 은서도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눠본 건 처음이었는데,
어린 친구들임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나는 가끔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느낀다.
어린 친구들과 대화가 잘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속으로 걱정할 때도 있지만,
생각보다 사람의 성향이라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이 풀리는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와 친해질 때 중요한 건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성향이 나와 얼마나 잘 맞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50분을 걸려 이곳까지 온 이유는
새연교 위에서 펼쳐지는 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2025년 7월 25일부터 총 60회의 문화공연과 불꽃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 불꽃 같은 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어도 사람 자체가 크게 변하는 건 아닌지
하늘 위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아주 짧은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여전히 좋다.
어렸을 때는 어른은 뭐든지 다 겪어봐서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저 어린아이처럼 마음 놓고 기뻐하지 않을 뿐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폭죽은 20시에 터질 예정이었고,
우리가 새연교 근처에 도착한 시간은 19시쯤이었다.
한 시간이 남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새연교 바로 옆에 있는 새섬공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불꽃만 보러 온 줄 알았는데,
새섬공원에는 아기자기한 오브제들이 많아서
약 30분 정도 걷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새섬 공원은 새섬 또는 모도(茅島)라고 불리는 서귀포시 서귀동에 있는 섬 공원이다. 억새인 새(茅)가 많아 붙은 이름이지만, 새(鳥)로 오해하여 조도(鳥島)로 오기하기도 한다. 새섬 공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새연교라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하는데, 바람과 돛을 형상화한 높이 45m의 주탑과 화려한 LED 조명 시설이 있어 밤낮으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새섬 공원은 도보로 약 2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으며 서귀포항과 새연교의 멋진 풍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출처 : https://www.ktourmap.com/spotDetails.jsp?contentId=2767627
새섬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아 잠깐 쉬고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연교 위에서 불꽃이 터지기 때문에
약 15분 전부터 통행이 통제되는데,
불꽃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새섬공원 벤치였던 모양이었다.
얼마 전 새벽,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무래도 제주에 온 이후로
내가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해서인지
행복한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축제를 보고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21시가 넘어 있었다.
피곤해서 술 없이도 잠들 법했는데,
시간이 가는 게 아쉬웠던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맥주를 하나씩 들고 1층으로 모였고
밖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또다시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건 래현 팀장님이 단톡방에 올려준 우리들 사진.
왼쪽 사진은 오설록에 갔을 때 팀원들끼리 모여 찍은 사진이고,
두 번째 사진은 산양큰엉곶에 갔을 때
햇빛이 얼굴로 스며드는 순간을 포착해 찍어준 사진이다.
다들 예쁘니까 잠깐 멈춰보라며 너스레를 떨길래
잠깐 멈춰서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물이 생각보다 더 예뻐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