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결이 잘 맞는다는 것은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기상 시각이 11시였다.
오늘은 한라산을 가는 날이라
한라산 팀은 6시에 1층에 모여 출발했는데,
그 팀이 10명 남짓이라
11시에 눈을 뜬 버킷 제주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고요했다.
(사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건 나였지만 ㅎ)
일어나고 보니
어제 함께 새섬공원에 놀러 갔던 은서가
오늘 일정이 없다고 해서
“그럼 우리 일정 없는 사람끼리 밥이나 먹을까?” 하고 물었고,
좋다는 대답을 들어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나왔다.
그 사이 한라산 팀이 복귀해 있었다.
원래는 숙소 근처에서 밥을 먹고
조용한 카페에 가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복귀한 한라산 팀 중 자차를 가져온 동준 오빠가
제주시까지 태워다 줄 수 있다고 해서 제주시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결성된 멤버는
나, 동준 오빠, 윤영이, 은서.
넷이서 제주시로 출발했다.
오늘의 제주 날씨도, 맑음.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컨디션이 약간 회복되었고,
날씨까지 좋으니
제주 워홀 3기에 합류한 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제주시까지 간다는 생각에 들떠 기분이 좋았다.
오늘 나에 대해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날씨가 좋으면
‘행복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는 것이다.
날씨가 좋아서 행복해,
밥이 맛있어서 행복해,
바다를 보고 있으니 행복해—
이런 식으로 자주 말하곤 하는데,
그저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보다
입 밖으로 꺼내 말할 때
행복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까지는 차로 1시간.
사실 동준 오빠는 오전 일찍 일어나 한라산까지 다녀온 상태라
몹시 피곤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제주시로 이동해준 것이었고,
그게 무척 고마웠다.
나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호의.
오빠 덕분에 제주시까지 나올 수 있어 기쁘다고, 행복하다고 전했다.
한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이동하면
금세 기가 쪽 빨려 피곤했을 테지만,
우리 넷은 모두 어느 정도 결이 맞아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덕에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동준 오빠와는 오다가다 인사를 나눠본 정도였지
깊게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는데,
차로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결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처음부터 빠르게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고,
인사부터 시작해 천천히 이야기가 깊어지며 친해지는 경우도 있다.
나는 후자의 방식이 조금 더 차분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서 좋다.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나도 모르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중이다.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제주시의 고기국수집.
사실 고기국수는 제주도 어디에서든 먹을 수 있겠지만,
이왕 차로 이동하는 거
도시다운 도시로 가보고 싶어 제주시에 있는 고기국수집으로 왔다.
나는 메뉴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윤영이와 은서가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함께 왔다.
메뉴는 고기국수, 멸치국수, 멸고국수 같은 국수류와
내장국밥, 고기국밥, 설렁탕 등이 있었다.
가게 앞에는 꽤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어영부영 하다 보니 15시쯤에 도착한 우리를
브레이크 타임 없이 받아주었다는 점이었다.
고기국수를 먹으러 왔지만 고기국수만 먹는 건 아쉽지.
사이드 메뉴에 찹쌀순대가 있어서
어떤 느낌의 순대인지 물어봤더니 막창으로 만든 순대라고 해서
호기심에 주문해보았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수보다 먼저 찹쌀순대가 나왔는데,
처음에는 약간 꼬릿한 향이 코를 스치지만
막상 먹어보면 쫀득한 찹쌀과 오묘한 풍미가 어울려
자꾸 손이 갔다.
실제로 만세국수에 오는 사람들 중
찹쌀순대를 좋아해서 방문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국수 메뉴들이 나왔다.
나는 고기육수의 짙은 맛보다는 멸치 쪽을 선호해서 멸고국수를,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고기국수를 주문했다.
멸고국수는 멸치 국물에 고기 고명이 올라간 메뉴라
나처럼 고기 육수의 진한 풍미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고기국수를 그다지 맛있게 먹은 기억이 없는데도
제주에 오면 괜히 관광객의 마음으로 꼭 한 번씩은 먹게 되는데,
이번에 먹은 고기국수는
내가 제주에서 먹은 고기국수 중 가장 맛있었다.
역시 기대 없이 먹는 게 더 맛있고,
굳이 줄 서서 먹지 않아도
맛있는 집은 많다.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윤영이의 추천이 있었던 ‘기록’이라는 카페였다.
우리 넷은 각자 할 일이 있어서
약속한 것도 아닌데 모두 노트북을 챙겨왔다.
심지어 각자 할 일에 몰두해야 하는 성격들이라
같이 카페에 가서도 각자 할 일을 하자며 약속하고 온 참이었는데,
이것 또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내가 집중하고 싶을 때에도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아주 가끔 난처해지는 경우가 있다.
싫은 건 아니지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조금씩 뺏기는 기분.
하지만 오늘의 멤버들은
정말 각자가 끝마쳐야 하는 일이 있었고,
각자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잘 맞았다.
기록이라는 카페는 크진 않았지만
따뜻한 색감의 조명과
커다란 음향기기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내 취향이었다.
카페 자체가 크지 않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 덕에 적당한 소음이 있어
글을 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테이블이 크지 않아서
의도치 않게 오빠는 다른 테이블에 앉고
우리 셋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는 성향도 비슷해서
우리는 셋 다 디카페인으로 주문했다.
윤영이랑 은서는 다른 방, 다른 조라
사실 접점이 거의 없어서
이렇게 함께 나오지 않았더라면
친해지기 어려웠을 텐데,
결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정말 다 각자 앉아서 할 일을 하는 우리 모습.
그 와중에 “말차 바스크 치즈케이크는 또 못 참지” 하며
하나를 사서 다 같이 나눠 먹었다.
이런 곳에서 취향이 맞는 사람을 만나고,
잘 맞는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차가 없으면 방문할 수 없는 소품샵.
제주는 관광지답게 소품샵이 여기저기 많은데
딱 한 군데만 갈 수 없는 게,
테마마다 물건이 다 달라 꼭 1-2개 이상은 둘러봐야 성에 차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동준이 오빠가 운전을 해준 것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곳을 둘러볼 수도 없었고
둘러볼 힘도 없었지만
오빠 덕분에 걸어서 가긴 먼 거리에 있는 소품샵을 들러볼 수 있어 좋았다.
사실 난 소품샵에 별 마음 없이 구경만 하러 들어간 것이었는데,
미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태닝한 키티가 한가득 있었다.
여름부터 여기저기서 찾아다녔는데
가을이 다 되어서야 마주하다니.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해서 물었더니
아직도 갖고 싶다며 너무 좋다고 방방 뛰었다.
그렇게 미나에게 주려고 선물을 고르고,
프로그램이 끝난 뒤 예정된 여행 이야기까지 하다 보니
이상한 점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끝나는 건 토요일인데,
동생은 금요일에 내려온다는 사실…!!
이건 내가 착각해서 생긴 일이었다.
숙소도 금요일 밤부터 잡아놓고,
동생도 금요일부터 렌트를 해두었는데
그걸 이제야 인지한 것이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오해했다고, 실수했다고 사과를 하자
착한 내 동생은 걱정하지 말라며,
언니 없어도 혼자 잘 놀고 있겠다고 했다.
내 동생… 쏘 스윗…
우디버디에서 남긴 우리들 사진.
나는 역시나… 거울샷이 가장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15시에 저녁을 먹고
18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와 숙소로 향했는데,
그러다 보니 저녁 시간이 애매해졌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로
굳이 뭘 먹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기가 막히게 배가 고팠다.
숙소에 돌아오니 개인 일정을 다녀온 동기가 있었는데
동기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같이 먹을래? 하고 물었고,
숙소 근처 치킨집에 포장 주문을 한 뒤 찾으러 갔다.
우리는 치킨과 피자를 주문해 먹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나둘 끼기 시작하면
금세 인원수가 늘어날 테니
같이 먹자는 말은 하지 않기로 철썩같이 약속한 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사람 마음처럼 되던가.
동기를 포함해 다섯으로 시작한 우리의 저녁은
하나둘 숙소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어느새 일곱 명이 되었다.
온천을 갔다 왔다는 정범 오빠와,
혼자 자전거 투어를 다녀온 우리 방 룸메 지영 언니까지 합류하게 된 것.
사실 다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입으로는 소수로 조용히 먹자고 해놓고도
술도 넉넉하고 안주도 넉넉하니
“같이 먹어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일정이 끝난 사람들이 자연스레 하나둘 모이더니
나중에는 누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치킨을 포장해 가져오는 길에
홍마트에 들러 장을 보며
여기저기서 빌린 술을 갚으려고
술을 꽤 넉넉하게 사왔는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잔뜩 사왔던 술은 이미 사라지고
누군가 “마시라”며 꺼내놓은
다른 사람들의 술까지 함께 마시고 있었다.
항상 이런다니까…
결국 술을 잔뜩 마신 나는
연주랑 랩실에 갔는데,
술을 마시지 않은 민재가
개인 할 일을 하고 있어서
잠깐 이야기만 나누다
숙소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행이다.
그래도 오늘은 2시에 잠들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