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잘 몰랐던 모습을 발견하는 일
다 같이 술을 먹고 이야기를 하느라
어쩔 땐 세 시, 늦을 땐 네 시에 잠들기를 반복하다가
어제는 두 시에 잠들었더니 오히려 약간 개운한 상태로 일어났지만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아침부터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그럼에도 오늘 오전엔 비치코밍이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방 룸메 연주를 포함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급변하는 제주 날씨에 호되게 당해
기침을 하거나 콧물을 훌쩍거리고 있는 가운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비치코밍을 하러 가는 것이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뜻깊은 일을 하는 거니까… ^^
하는 마음으로 기쁜 척하며 나섰다.
(약간의 뻥)
나는 비치코밍을 이번에 처음 한 것으로도 모자라
비치코밍이라는 단어 자체도 처음 들어봤는데,
해변에 있는 쓰레기를 줍는 일이라고 했다.
비치코밍은 해변(beach)과 빗질(combing)의 합성어로, 해변에서 표류물이나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환경보호 활동입니다.
본래 예쁜 조개껍질이나 마모된 유리 조각을 찾는 행동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해양쓰레기 수거에 중점을 둡니다.
플로깅과 함께 운동·레저를 즐기며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트렌드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라
머리카락은 엉망이고, 감기라도 곧 걸릴 것처럼 으슬으슬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주워 다녔다.
해변에는
바다를 즐기러 왔다가
자의든 실수든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제주도에는 쓰레기가 꽤 많다고 한다.
그래서 자선 단체에서 봉사활동으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다들 몸에 어느 정도 감기 기운이 있는 가운데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쓰레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커피컵이나
담배꽁초, 스티로폼, 비닐봉투 등을 주워 어느 정도 모아두고
추운 몸을 녹이러 카페에 가보았지만
문을 연 곳이 없어, 결국 편의점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꽤 추웠는데 사진은 그저 청량하게만 나오네.
열심히 걸어 도착한 편의점.
우리 팀의 가장 맏언니인 민선 언니가 커피를 사주셨다.
커피뿐만 아니라 아침이니까 군것질도 하자며
과자까지 사서 나눠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먹었다.
사실 에너지가 바닥나기 시작하자
처음엔 모두와 친해지고자 했던 노력들에 대해
약간의 현타가 오기도 했다.
누구도 시킨 적 없고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일인데도
나 혼자 무리하며 지낸 끝에 생긴 결과였다.
스스로 지쳐놓고 현타 오는 내가 바보 같았지만,
그럼에도 힘들어하는 내 마음을
조용히 알아주려는 팀원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건 제주 워홀 참가자였던 분의 특강.
나보다 어린 분이었는데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고 있어
신기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특강을 듣고 나서 찾아온 나른한 점심.
특강이 끝나고 약간의 여유가 있어서 3층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영민이가 1.5층 코워킹 마루에서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
영민이는 어린데도 속이 깊고 성격이 좋아
따르는 동생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늘 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바쁘게 돌아다녔고
운전도 해주랴, 이야기 상대도 해주랴
항상 피곤해 보였다.
인기남의 비애인걸까 ^^..
오늘의 점심.
간장불고기와 호박전, 멸치볶음 등 건강하고 맛있는 반찬으로 한 끼를 든든히 먹었다.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침도 챙겨 먹는다는데,
나는 아침 대신 잠을 선택하고 있어서 오늘의 첫 끼였다.
배가 고파서 많이 먹고 싶었지만
첫 끼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지 않아 적당히 먹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저녁을 먹을 때까지 내내 배가 고파
꼬르륵 소리와 함께였다고 한다.
점심을 먹은 뒤엔 16시까지 자유시간이었다.
자유시간이 꽤 길어서 몇 명은 차를 타고 멀리 이동해 팀 프로젝트 이야기를 나누러 갔지만,
우리 팀은 운전할 사람이 없어
랩실에 모여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얼른 끝내기로 했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그동안 계속 이야기해왔던
제주 힐링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을 나누었고,
챗지피티의 도움을 살짝 받아 그걸 PPT로 정리했다.
아주 잠깐 집중했을 뿐인데 어느새 16시가 다가와 있어서
괜히 급해진 마음으로 눈이 빠질 정도로 집중해
1차 초안을 끝냈다.
16시 20분에 모여 특강을 들으러 이동하기 전,
잠깐 바라본 제주 앞바다의 모습.
어쩜 이렇게 완벽한 날씨에 제주도를 방문할 수 있었을까.
날씨가 너무 더우면 밖에서 무언가를 즐길 수 없었을 것이고,
너무 추우면 바람을 피하느라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을 텐데,
가을에 온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춥지만 않다면 밖에서 내내 있고 싶을 정도로 제주가 좋다.
이 정도면… 제주를 사랑하는 거 아닐까.
특강을 들으러 차로 2-3분 이동 후에 도착한 이곳.
- FOP 카페 대표 반형식
- 인스타그램 : @fop_cafe
- 프로필 : 전) 글로벌제주문화협동조합 멤버 & 제주청년농부 대표 → 현재는 개인 커피카페 창업 → “Focus on People(사람에게 집중하다)”라는 철학 아래 운영
- 주요 키워드 : 로컬 카페 창업, 사람 중심 경영, 청년 농부 출신
‘사람에게 집중하다’라는 부제를 가진 이 카페는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력과 생각,
그리고 순천 사람이 어떻게 제주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들려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문득 신기하다.
어떻게 30명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모임을 운영하면서 많을 땐 18명,
적을 땐 8명 앞에서
모임의 취지와 나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할 때가 있다.
처음엔 엄청 떨렸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여전히 긴장되는 일이다.
그래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신기한 마음이 든다.
점심을 적게 먹고,
신경 쓸 게 많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팀 프로젝트를 끝내고
쭉 이어지는 특강까지 듣느라
뱃속에서는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허기진 상태로 기다리고 기다린 저녁.
오늘의 메뉴는 카레라이스와 후라이가 포함된 저녁이었다.
배가 고파 듬뿍 먹어야지, 많이 먹어야지 생각하면서도
뒷사람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손이 줄어들어 적게 담게 되었다.
그래서 밥을 먹으며 내내 생각했다.
오늘 저녁엔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조건 단백질을 채우러 편의점에 다녀와야겠다고.
홀로 5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핫바 하나를 사 먹고 돌아오니,
내가 아끼는 동생들인 소희와 다빈이가 내려와 있었다.
며칠 동안 이어서 술을 마신 탓에
이제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일정이 끝나고 술을 마시지 않자
생각보다 밤이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모두가 며칠간 술을 자주, 많이 마셔서인지
오늘만큼은 1층이 조용했다.
그때 거봉을 같이 먹자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걸어오는
소희, 다빈이, 솔휘, 은서와 함께
1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교차가 커지는 가을이다 보니
다들 감기며 몸살이며 몸이 좋지 않아
골골거리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란히 앉은 세 명, 소희·은서·다빈이
비슷한 계열의 색상으로 옷을 맞춰 입고 있어서
그게 귀여워서 찍어본 사진.
다들 웃으며
“환자복 아니냐”, “아픈 사람들끼리 맞춰 입은 거 아니냐” 하며
웃픈 농담을 나눴다.
우리는 거봉을 큰 대접에 가득 먹고도 배가 고팠다.
홍마트, 우리만의 핫플에 가고 싶었지만
남은 에너지를 따져보니 쉽지 않을 것 같아
차를 태워줄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들어온 동준 오빠.
착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었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다가가 혹시 태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오빠가 흔쾌히 태워줘서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분명 매끼를 잘 챙겨 먹었는데도
돌아서면 배가 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성장기라서 그렇다 쳐도,
지금은 성장기도 아닌데
이곳에서는 밥을 매끼 잘 챙겨 먹어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배고픈 얼굴로 모여 앉아,
그동안 열심히 사 모은 친구들의 도토리를 꺼내 함께 나눠 먹었다.
귤, 키위, 포카칩 같은 소소한 간식들이었다.
우리는 다 함께 먹자고 꺼내놓은 것들을 부지런히 집어 먹으며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말들을 수없이 나눴다.
나중엔 홀로 술을 즐기던 민석이와
희지, 재연이도 내려와 이야기에 합류했다.
희지와 재연이가 나와 같은 경상도 사람이어서
사투리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쉼 없이, 별것도 아닌 말들에 웃고 떠들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느덧 10시.
조용한 1층에 있던 다른 방 친구들이
피곤하다며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나 역시 못 다 쓴 브런치를 마저 쓰기 위해
랩실로 자리를 옮겨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랩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정범 오빠가 맥주를 마실 건데 같이 할 거냐고 물었다.
배고프던 찰나라 잘 됐다 싶어 따라 나섰고,
막걸리 한 병을 사 들고 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내가 이렇게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이곳에 와서 다시금 알게 되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