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완벽할수록 아쉬워지니까
오늘 오전엔 9시부터 10시 반까지 팀 프로젝트를 작성하는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진작에 프로젝트를 끝내두었던 터라
서로 맡은 바의 진행 상황만 간단히 확인하고
각자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블로그를 맡은 지민이와 하은이는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고
오후에 카페에 가게 되면
그때 마무리한 걸 보여준다고 했다.
PPT를 맡은 나는
추가해야 할 부분을 팀원들에게 보여주었고,
편집 담당이었던 소희는
오늘 중으로 최종본을 만들어 공유해주기로 했다.
열심히 PPT를 만들던 시간도,
릴스를 찍으며 웃고 떠들던 시간도
이제는 하나둘 마무리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ppt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나서는
정범 오빠가 드라이브를 가자고 해서
둘이 차를 타고 근처의 ‘감저’ 카페에 갔다.
여기는 예전에 고구마 전분 공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그 구조를 거의 그대로 남겨두고 카페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공간이 넓다 보니 길냥이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사장님은 그 아이들을 반은 길냥이, 반은 집냥이처럼 돌보며
밥도 챙겨주고 지내신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카페나 식당을 유독 좋아하는 편이다.
감저는 제주도 말로 ‘고구마’라는 뜻이라고 했다.
처음엔 ‘감자’인가 싶었는데, 제주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고 부른다는 게 신기했다.
이름에 걸맞게 시그니처 메뉴도 감저 시그니처가 있었는데
연유와 우유를 베이스로 한 음료에 에스프레소가 들어가고
그 위에 고구마 아이스크림이 올라가는 메뉴였다.
나는 원래 아메리카노를 가장 좋아하지만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시그니처는 못 참지.
따뜻한 가을 햇볕을 받으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라니.
이런 순간들이 제주에서의 시간을 더 귀하고, 더 애틋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정범 오빠랑은 유난히 말이 잘 통해서
자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텐션도 잘 맞아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시간이 늘 후루룩 흘러가버렸다.
숙소로 돌아온 뒤의 점심.
사실 감저 카페에 갔을 때부터
방에 휴대폰을 두고 가서
밥을 먹을 때까지 휴대폰이 손에 없었다.
이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희가 찍어서 보내준 사진.
양배추쌈에 고기, 계란국까지 — 완벽한 한 끼였다.
오늘도 날씨는 참 맑고 화창했다.
가을 햇볕은 따뜻하다 못해 조금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고,
가을 바람은 조용히, 부드럽게, 곁을 스쳐 지나갔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적당한 날씨.
이렇게 완벽한 날씨니까
시간이 흐르는 게
더더욱 아쉬울 수밖에.
점심을 먹고 나왔더니
연주와 민재가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야기의 흐름이 팔씨름까지 이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마치 이 한 판에 모든 명예가 걸린 것처럼
진지하게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운동을 꾸준히 한다는 민재가 결국 이겼는데,
연주는 어쩐지 그게 살짝 아쉬워 보였다.
팔씨름을 구경하다가, 이번엔 동기와 산책을 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함께 걷게 된 산책길이었는데,
가는 길 내내 청명한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어
몇 번이고 사진을 찍었다.
동기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친구였지만
로컬 관련 사업을 하고 있어서인지
어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배울 점이 많았다.
말도 재치 있게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타입이라
주변에 늘 사람이 많은 느낌이었는데,
또 의외로 혼자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
가끔 혼술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서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렇게까지 깊게 이야기해볼 기회가 없었던 게
문득 아쉬워졌다.
이건 숙소로 돌아오는 길, 햇볕을 쬐고 있던 댕댕이를 보고 찍은 사진.
제주도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가끔은 바람소리가 거칠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바람만 잔잔하면 햇살이 따뜻해서
섬 특유의 온화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런 제주 날씨를 변덕스럽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날씨가 화창하게 웃어주는 날이면
마음까지 깊숙이 환해진다.
오후 시간엔 팀별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릴스도, 팀 프로젝트도 모두 마무리한 우리는
각자 쉬거나 개인 시간을 가져도 됐지만
늘 자유시간을 바쁘게 보내다 보니
정작 팀원들끼리 온전히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늘 오후만큼은 우리 팀끼리 시간을 보내자고.
그리고 착하고 따뜻한 우리 팀원들은
내 말에 기꺼이 동의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핑크뮬리로 유명한 마노르블랑이라는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마노르블랑은 2천여 평의 정원을 갖춘 곳인데,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전망을 자랑하는 정원 안에는
사계절 꽃이 피는 1만 5천여 평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입장하려면 4천 원을 내거나
음료를 주문하면 된다.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한 번쯤은 꼭 와서 보고 싶던 풍경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풍경.
이런 곳이라면 솔직히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잖아...
나는 오전에 정범 오빠랑 커피를 마시고 와서
티를 주문했고,
민선 언니는 “다 같이 먹자”며 케이크까지 주문해주셨다.
우리 팀원들 정말 좋아…
나는 사람도 좋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아하지만
텐션이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너무 다행히도 우리 팀원들은
나와 결이 참 잘 맞았다.
텐션을 억지로 끌어올릴 필요 없이
조용조용,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람들.
저번 기수에는 팀장을 뽑아 팀을 나누었다고 하고,
이번 기수에는 정말 랜덤으로 제비뽑기로 팀을 나누었다는데,
어쩌면 이렇게 팀이 잘 뽑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팀은 모두가 다 좋았다.
나는 남이 찍어주는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다른 글에서도 한 번 밝힌 적이 있다.
남이 찍어주면 우선 내가 뚝딱거리는 순간이 드러나는 것 같고,
그게 그대로 결과물에 남는 게 싫어서다.
그래서 평소에는 내가 찍는 편이지
타인이 나를 찍어주겠다고 하면
거절부터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소희가 얼른 서보라며
예쁘게 찍어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길래
못 이기는 척 카메라 앞에 섰다.
소희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언니 이뻐요~~!!” 하고 너스레를 떨곤 하는데
그 모습이 또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버렸다.
덕분에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찍혀서
참 마음에 드는 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카톡 프로필 사진이 된다)
우리가 여기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동기 팀의 선아 언니도 핑크뮬리를 보고 싶다며
우리가 있는 카페로 찾아왔다.
처음엔 입장료가 있어서 굳이?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데
막상 들어오고 보니 충분히 예뻐서 괜찮다고 했다.
나와는 팀이 달라서 오래 이야기하거나
사진을 함께 찍지는 못했지만
정범 오빠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카페에서 꽤 오래 머무르며
정원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며 시간을 보냈고,
동기 팀은 잠깐 앉았다가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팀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는데,
우리 팀은 팀장인 소희가 다정다감하게 잘 챙겨줘서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포근한 분위기였다면,
동기 팀은 평균 연령대가 조금 더 높은 편이라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알뜰히 아끼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윤영이 팀, 영민이 팀, 민석이 팀, 동기 팀, 연주 팀, 우리 팀.
총 여섯 개의 팀이 있었는데,
각 팀마다 분위기와 결이 전혀 달랐다.
어떤 팀은 무척 쾌활하고 밝은 에너지가 강했고,
또 어떤 팀은 각자 개인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따로 다니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꼭 모여 서로를 챙기는 팀도 있었다.
나는 솔직히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면
당연히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고,
어쩔 수 없이 여러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다들
서로 잘 어울려 지내고,
서로의 다른 점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팀별 분위기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내가 좋은 점만 보려고 해서
그렇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지만,
그게 뭐 어떤가 싶다.
좋게 보고 싶을 만큼
그 순간들이 참 따뜻하고 좋았으니까.
영민이나 동기는 스타렉스를 운전했기 때문에
팀원들이 이동할 때 자연스레 본인이 모는 차로 사람들을 태워 다녔고,
민석이는 개인적으로 빌린 차를 이용했다.
하지만 우리 팀, 연주 팀, 윤영이 팀은
이동할 수 있는 차량이 없었다.
그럴 때면 운전자 팀에게 부탁을 해야 했는데,
오늘 우리 발이 되어준 건 다름 아닌 래현 팀장님이었다.
래현 팀장님과는 비교적 처음부터 친해졌는데,
순천 한 달 살기에서 알게 된 수민이라는 친구가
버킷 제주 2기 멤버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통 화제가 생겨 이야기의 문이 쉽게 열렸기 때문이다.
래현 팀장님은 나보다 오빠였지만
전혀 꼰대 같지 않았고,
누구를 대할 때도 미움 없이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또 사소한 농담에도 잘 웃어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 점이 늘 고마워서
나도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고 했는데,
그런 나를 예쁘게 봐주셨는지
초콜릿도 사주셨다. (ㅎㅎ)
저녁 시간!
우리는 19시에 황금물고기에서 룸메들끼리 모여 술 한잔을 하기로 했다.
저번에 황금물고기에서 친해진 사장님이
거의 아빠처럼 친근했기 때문에 한 번은 더 가고 싶었는데
룸메들끼리 마음이 잘 맞아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오늘도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느라 늦어버렸고,
다른 룸메들 먼저 가고 있으라고 한 뒤
뒤늦게서야 부랴부랴 따라 가기 시작했다.
홀로 걸어가면서 본 노을.
노을은 함께 볼 때면 예쁜데
혼자서 보면 괜히 쓸쓸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2주간의 제주살이가 마무리 되고 있기 때문이거나
가을을 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선 배가 고파왔기 때문에 우선은 부지런히 걷는 걸로.
다행히 열심히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 룸메들이 보였고
후다닥 뛰어 그들과 합류해 다같이 황금물고기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장님께서는 저번 주에도 왔던 나랑 연주를 알아봐주셨고,
잠시 후에 연주도 해주시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게 화근이었다. 복선)
나는 어렸을 때는 소주를 곧잘 먹었다.
소주는 배가 잘 안 불러서 화장실을 자주 안 가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만큼 내가 금방 취해버린다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고른 술은 ‘소주’.
회에는 소주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2주 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던 룸메 지영 언니가
소주를 먹겠다고 해서 나도 같이 소주를 선택했다.
나는 나이도 이제 꽤 먹었고,
할 실수는 할 만큼 했으니
이번엔 괜찮겠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는 소주에 또 빠르게 취해갔다.
연주를 해주시는 사장님 옆으로 가서
박수도 치고, 손도 흔들고,
엉덩이도 신나게 흔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쉼 없이 먹고 마시고 있었고
결국 빠르게 취해갔다.
문제는 그렇게 취하는 사이
소주잔을 깨뜨리고
물까지 흘렸다는 사실이었다.
맥주는 취하기 전에 배가 먼저 불러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취한 내 모습을 체크할 수 있는데,
소주는 배가 부르지 않다 보니
취한 줄도 모르고 계속 마셨고,
정신을 차려보니
만취 상태인 내가
정범 오빠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 오늘의 교훈.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실 땐,
물을 잔뜩 먹어서 배를 먼저 부르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