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딱 일주일만 더 있었음 좋겠다
지난밤, 술을 잔뜩 먹었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잔뜩 마시고
다음 날 오전엔 골골거리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사람 꼴을 찾는다.
대학생 때도 이렇게 지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날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해보니
아마도 날 다정히 봐주는 멤버들의
따스한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왼쪽에 놓여있는 피로회복제는
같은 방을 쓰는 주이가
내가 너무 피곤해 보이자 슬쩍 건네준 거였는데,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주이는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숙취에 쩔어서 힘들어한 적이 없는데,
그보다 한참 어른인 나는
계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어른스럽지 못하다.
(으이구 자랑이다)
오늘의 점심은 김밥.
내가 좋아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반기지 못한 것은
숙취로 인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
오전 특강 시간에 내려오지도 못하고
내내 누워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내려온 터라
친한 몇몇 동생들이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숙취라고 말하기 부끄러워서
처음엔 그냥 컨디션이 조금 안 좋다고 했는데
나중에 어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고 실토하자
다들 “으이구~”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꼭 기억해야 할 것.
사람이 술을 마셔야지,
술이 술을 마시는 지경까지는 가지 말 것.
오후엔 두 시간 동안 감귤을 따는 체험을 하고
용머리 해안에 들를 예정이었는데
날씨가 별로인 탓에 입장 할 수가 없었다.
해식애 앞쪽으로 좁지만 평탄한 파식대가 발달되어 용머리해안을 일주 할 수 있는 탐방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바퀴 돌아보는데 3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기상악화나 만조때에는 위험성이 높아 출입을 금하니 방문 전 미리 관람 가능 시간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서귀포시 공영관광지 인스타그램(@6sot_official)을 방문하면 물때와 기상 상황에 맞추어 매일 아침 관람 가능한 시간대를 올려주니 방문 전 참고하도록 하자.
우리는 감귤 체험을 하기 전에 모두 모여
그 이후 일정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래현 팀장님이 두 가지 선택지를 줬는데
두 가지 모두 입장료가 10,000원에 달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선택지도
있으면 좋겠다고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몇몇 친구들도
동조의 목소리를 보탰다.
왜냐하면,
어제부터 바베큐를 할 사람들을 모아둔 상태였는데
여기저기 일정들을 하다 보면
장을 보러 갈 시간이 부족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귤 체험을 다녀온 뒤
바로 장을 보러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동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고,
우리는 감귤 체험만 하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감귤 체험을 하러 돌담프룻으로 향했다.
제주에 여행을 자주 왔던 나지만
감귤 체험은 처음이었다.
사실 이런 게 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고,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겠지만
제주에 와서까지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제주에서는 그냥
바다만 실컷 보고 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니
내가 평소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
뭐랄까.
가기 전엔 귀찮은데 막상 가보면 후회는 없는
그런 경험들이 내 안에 천천히 쌓이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달까.
그게 너무 감사하고 좋다.
왼쪽 사진은 감귤 체험을 하러 이동하는 우리 멤버들이고,
오른쪽 사진은 우리가 타고 이동하던 차량들이다.
첫 번째 흰색 승용차는 민석이가 개인적으로 빌린 차,
두 번째 흰색 스타렉스는 영민이가 운전하는 차,
세 번째 연한 녹색은 래현 팀장님이 운전하는 차,
마지막 진한 녹색은 동기가 운전하는 차다.
멀미가 심한 나는
그나마 새 차에 가까운 흰색 스타렉스 앞자리에 타거나
운전을 잘하는 래현 팀장님 옆자리에 앉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동기가 운전하는 차는
한 번도 못 타봤네.
사장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돌아다니며
귤을 잘 따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예전에 고등학생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에
친구 어머니를 도와 딸기를 따본 적이 있었다.
그때 딸기를 딴다는 게 생각보다 얼마나 품이 드는 일인지 알게 되었는데,
귤을 따고 있으니 그때 일이 10년도 넘게 지나 다시 떠올랐다.
사람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그 어떤 경험이라도 살갗에 붙듯이 남아
조금씩 개인을 성장시키는 것 같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오늘은 날이 약간 흐린 날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귤을 따기 더 수월했다.
내가 제주에 온 이후로는
‘완벽하다’ 싶은 날씨가 계속 이어졌는데,
또 이렇게 흐리면 흐린 대로
몸을 많이 쓰는 활동을 하기엔 더 편했다.
이건 뭐든 기쁘게 보려는 내 마음이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걸 수도 있고,
정말로 제주가 내게 주는 작은 선물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전에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다들 열심히 귤을 따는 사이 먼저 빠져나와 앉아 있을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준 오빠, 정범 오빠, 동기가 이미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인정이냐며 서로 웃고 놀리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합석했다.
역시 나이가 많으면 잔꾀만 늘어서
이렇게 농땡이를 먼저 피우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사실 귤을 크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딴 귤도 누가 달라고 하면 줄 생각으로 들고 있었는데,
이미 본인이 먹고 싶을 만큼
귤을 잔뜩 수확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비닐봉투에 담아 갈 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까먹을 수 있었는데
다들 욕심껏 잔뜩 따와서는
한두 개씩 뇸뇸 입에 넣어 맛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첫째라
네 살 터울인 둘째와 여섯 살 터울인 막내 동생이 있다.
그 중에서도 막내를 가끔 “아가” 하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그 막내 동생보다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
하나같이 다 귀여워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다 모아놓고
맛있는 거 잔뜩 사주고 싶을 만큼.
다들 귤을 따느라 여념이 없을 때
나와 솔휘, 소희는 민석이 차를 타고 먼저 이동했다.
바베큐 파티를 위해 장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민석이는 개인적으로 빌린 차로
내내 팀원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이동해주었는데
그 마음이 참 예뻐보였다.
나는 같은 팀이 아니라
민석이 차를 탈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 장을 보러 가는 김에 자연스럽게 타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서
수많은 얘기가 오가는 스타렉스와는 달리,
민석이가 운전하는 차에는
우리 넷만 타고 있어서
조용조용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바베큐 파티를 하게 된 건 사실 아주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시작된 거였다.
며칠 전 거봉을 나눠먹을 때
“다 같이 회나 사서 먹자” 하는 이야기가 오갔고,
거기서 “그럴 거면 고기도 구워먹자”는 말이 붙었고,
그러다 보니
“고기 구워먹을 거면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부러워할 텐데 그냥 다 같이 먹자는 말도 해볼까?”
이런 흐름까지 이어지게 된 것.
이사장님께 이러이러한 이유로 저녁에 고기를 구워먹고 싶다고 말을 드렸고,
“뒷정리만 잘하면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모인 건 개인 일정이 있거나 온천에 다녀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총 11명.
우리는 각자 2만 원씩 모으기로 했고
그 돈으로 삼겹살, 목살, 회, 술까지
잔뜩 사들고 돌아왔다.
바베큐 파티를 할 예정이라 저녁을 안 먹어도 됐지만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나와버려서…
안 먹을 수가 없었다. ^^
이런 핑계를 대며 자연스럽게 가서 밥을 퍼 먹었다.
이때 먹은 김치찌개가 진짜 너무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19시에 모든 일정이 끝난 정현이가 합류하면서
김치찌개 냄비째 들고 나왔으니까.
정현이는 우리 기수 멤버는 아니었고
2기에 참여했다가 제주 버킷이 너무 좋아
크루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였다.
다람쥐처럼 생겨서 참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접점이 없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딱히 없었다가
바베큐를 핑계로 드디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정현이는 속이 꽤 깊은 친구였다.
제주 버킷이 좋아서
2기 프로그램 종료 후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린데 제주에 머무는 게 아쉽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시 30분부터 시작된 파티.
파채를 만들고 쌈 채소를 씻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나도 뭐라도 거들어보겠다고 서성거려봤지만
착한 정범 오빠와 민석이가 이미 열심히 불을 피우고 있었고,
그 곁에는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수많은 친구들이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쩜 다들 마음이 이렇게 착하고 예쁠 수 있을까.
혼자 앉아있으려니까 괜히 미안해져서
다시 근처로 가보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고,
활활 타오르는 고기만
몇 번 뒤적이다가
다시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ㅎ)
고기가 다 구워지고,
우리는 술잔을 들고 자리에 서서 짠을 나누었다.
사실 밖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다는 건 낭만이 있지만
그만큼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귀찮아하지 않고 힘을 모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바베큐 파티가 애초에 내가 낸 의견이었는데도
동생들이 싫은 기색 없이 잘 따라준 게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동생들은 오히려
“언니 덕분에 다 같이 모여서 고기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기쁘고, 이쁘고,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지금보다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고기가 다 구워지고
다들 자리에 앉았을 때
사진을 찍자며 카메라를 들었고,
다들 귀엽게 브이를 하며 함께 찍어주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생겼다.
앞으로 힘들 때 꺼내볼 수 있는
소중한 추억 창고 속에
조심스레 넣어두어야지.
고기를 구워먹고 있으니
맛있는 냄새를 맡은 동네 길냥이들이 총출동을 했다.
그동안엔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안 보이더니
고기 냄새 앞에서는 이렇게나 빠르게 나타나다니.
우리는 이미 꽤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식어버린 고기 몇 조각을 잘게 잘라 던져주었다.
몇 명은 별 생각 없어 보였지만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와 소희는
열심히 조각을 나눠 던져줬고,
나중엔 정범 오빠와 동준 오빠도 합류해서
같이 나눠주는 데 일조했다.
날씨가 곧 추워질 텐데,
이 친구들이
이렇게라도 든든하게 밥 한 끼 먹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고기를 다 구워먹은 뒤엔
택민이였는지 주이였는지, 누구 건지는 모르겠지만
바닷가 앞에서 스파클라를 태우자며 우르르 몰려가길래 나도 그냥 따라 나섰다.
폭죽을 터뜨린 적 있다고 말만 들었었는데
눈앞에서 환하게 피어오르는 스파클라를
밤바다 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우리는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제주 뽕’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했는데,
제주가 주는 낭만의 힘이라는 뜻이었다.
바다가 앞에 있고,
노을은 활활 타오르고,
사람은 많지 않아 조용하고,
그런 제주 풍경 속에 들어와 있노라면
그냥 누구라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뉘앙스.
실제로도 누가 누굴 좋아한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살짝살짝 들려오긴 했지만
그건 나와는 거리가 꽤 먼 이야기였는데,
밤바다 앞에서 스파클라를 태우고 있으니까
옆에 있는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아주 잠깐 스쳤다.
스파클라를 다 태우고 난 뒤에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열심히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숙취로 헤롱거렸는데
또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다니.
마음이 아쉬운 만큼 새벽이 넘도록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었지만
내일은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적어도 발표만큼은
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므로
오늘은 더 많이 마시지 않고
중간에 조용히 자러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쉬운 마음이 뚝뚝 흘렀지만,
내일을 위해서라면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기도 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게. 으른.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