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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즐기는 워홀 3기 (6)

6. 시간아 조금만 천천히 가

by 이양고


1. 역시 사람은 잘 자고 봐야한다.


어젯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제주의 밤을 느낄 새도 없이 일찍 잠들었다.

잠들면서도 이렇게 자버리기 아까운데…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처럼 깊게 잔 잠이 보약이 되어 몸이 개운하다.


역시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
그게 가장 기본이다.




이건 산방산에 갔을 때의 사진.

우리의 사진 작가님, 래현 팀장님은

어디서든 사진을 찍어주시고
그걸 매일 정리해서 단톡과 블로그에 올려주신다.


어디서든 사진을 남겨두지 않으면

기억은 금방 휘발되기 마련인데,
이렇게 찍힌 사진을 다시 보니
송악산까지 걸어가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근데 어떡하지.
이렇게 단체로 찍힌 사진을 보고 있으니까,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끝을 미리 떠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슬프다.


2주라는 시간이 다 지나가면
이 감정은 더 짙어져 있을 테지.


2주 뒤의 나는
2주 전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얼마만큼 성장해 있을까.
괜히 궁금해진다.




오늘의 첫 일정.
팀과 함께 하는 가치관 토론.


다른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일어나
아침도 먹고 아침 운동도 했을 테지만,
내게는 잠이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침은 스킵하고 9시에 맞춰 1층으로 내려갔다.


잠을 잘 잔 날에는 몸에서 느껴지는 개운함이 있다.
몽롱함과는 전혀 다른, 머리가 또렷해지는 감각.


역시 2–3일 정도 고생하고 나면
술 없이도 기절하듯 푹 잠들 수 있는 모양이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까지

가치관 토론 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듣고,
10시 20분까지 마무리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팀은 다 함께

코워킹 마루로 올라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팀은 다른 팀에 비해

전반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편이라
1층 공용공간에서 이야기하면 금방 묻힐 게 뻔했다.

그래서 래현 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마루로 올라온 것이었는데,
조용히, 차분히,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다.




벌써 5일째 팀원으로 함께하고 있지만,
사실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각 잡고 이야기하려고 하면 괜히 머쓱해지기도 하고,
30명이나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친한 사람, 덜 친한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들에게 갑자기 가치관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나는 예전부터 글쓰기 모임이나 필사 모임을 운영하며
누군가의 가치관, 생각, 일상을 듣는 일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유독 잘 맞는 팀원들과 함께
조용히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참 즐겁게 느껴졌다.


돈, 시간, 인간관계, 성장, 책임 등
구체적인 질문과 추상적인 질문들로 이루어진

가치관 이야기는
처음엔 아주 가볍게 흘러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어지고 깊어졌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표현이 두 가지 있다.


민선 언니는
제주 버킷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색깔이 묻어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도 더 알록달록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기쁘다고.


그리고 소희 팀장님은
변화 앞에서 가끔 움츠러드는 자신을
“뛰어오르기 전, 몸을 낮추고 있는 개구리 같다”고 표현했다.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그 말이 너무 인상 깊었다.

변화 앞에서 움츠러드는 건
두려워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단단히 나아가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



10시 반부터는 특강이 진행됐다.

전 글제문 이사장님이시고, 현재는 글로벌 워킹 홀리데이 플랫폼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하셨다.


이번 제주 로컬 프로그램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살아온 길을 전해듣는다.


이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쉽게 접할 수 없었을,
각자의 결이 뚜렷한 사람들.


지금까지 제주 버킷에서 다섯 번의 특강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해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바로, 주저하지 말고.
어떻게 되든 포기하지 말고.
그냥 해보라는 것.


가끔 글을 쓰기 위해 일을 그만둔 게
정말 잘한 선택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보게 될 것 같다.






드디어 점심 시간!

오늘의 점심은 양배추 쌈과 부추전, 감자채볶음, 제육볶음!!


양배추 쌈을 몹시 좋아하는데, 이렇게 먹을 수 있어서 기뻤다.
더 많이 먹고 싶었지만,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펐다.


너무 맛있어서 양배추 쌈을

더 먹어도 되냐고 여쭤봤는데
아직 뒤에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1·2기 때보다 다들 잘 먹어서
요즘은 항상 1.5배씩 만들고 계신다고…ㅎㅎ




헤헤 감사합니다.
제가 바로 그 중 한 명이에요.






밥을 먹고 나서는 14시까지 여유시간이 있다.


이 시간에는 원래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편인데,
동기랑 정범 오빠가 카페에 가자고 해서
이야기도 나누고 산책도 할 겸 따라 나섰다.


가려던 찰나, 뒤에서 민재와 연주도 함께 하게 되어
다섯이서 사이좋게 카페로 향했다.


제주도에 온 지 5일째.
시간이 가는 게 아쉬워서,
방에서 혼자 있는 게 아쉬워서,

다른 사람들이랑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놓치기 아까워서
방에서 쉴 법한 시간에도 자꾸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30명 중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들이 가진 매력과 성격을
조금씩 흡수하게 된다.






아주 시덥잖은 이야기들로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어 돌아가는 길.

오늘도 아주 완벽한 하늘이, 날씨가 우릴 반겨준다.




2. 촘촘한 밀도의 시간 안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20분 거리에 위치한 오설록.

여기도 예전에 동생이랑 여행 왔을 때 들렀던 곳이다.

그때도 둘이 와서
“여기 사람 왜 이렇게 많아..? 기 빨린다..”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나 사람이 너어무 많다.


이런 관광지 돌아다니는 여행…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

(물론 예쁘긴 하더라. 그러니까 관광지겠지.)




오설록에서도 모인 우리 팀.


ppt도 만들어야 하고, 사업 계획서도 만들어야 해서
팀 단위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어떤 내용으로 ppt를 만들지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다른 곳도 가볼까?” 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저 멀리서 귀여운 걸 발견해서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가족끼리 티를 맞춰입은 가족과

나란히 돗자리에 누워서 데이트를 즐기던 영민과 택민.

사람이 많다는 건 다양한 장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오설록에는 사람이 너어무 많아서
앉을 자리도, 심지어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만큼 빼곡했다.


그래서 그나마 자리가 있는 이니스프리 카페로 이동해
그곳에서 커피를 주문하기로 했다.




이니스프리에 앉아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장면.

오설록 차밭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는지,
다들 아주 귀엽게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런 관광지에 온 날이면
래현 팀장님은 더 바빠지신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어주세요!”라는 말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귀찮을 법도 하고,
가끔은 거절하고 싶을 때도 있을 텐데
래현 팀장님은 늘 피곤한 기색을 숨기며
정성스럽게 모두 찍어주신다.

그게 항상 너무 고맙다.




이윽고 나온 커피.

완벽한 날씨 아래서

여유를 잔뜩 부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날이다.



오설록에서 마주한 풍경들.


나는 사실 카페에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홀로 조용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고요하게 사색하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며 지내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모두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가고
낯선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극도로 외향적이고 누구와도 금방 친해질 것 같다는 인상이라는 것.


하지만 의외로
나는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동시에
혼자 사색하는 시간,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면
생각보다 종종, 의외라는 반응을 듣는다.




오설록에 돌아온 뒤 이어진 저녁 시간.


김치찌개, 옛날 소시지, 계란말이 등이

차려져 있었는데
특히 계란말이와 김치찌개의 조합이 무척 맛있었다.


사실 오늘 저녁엔
정범 오빠, 동기, 나, 연주, 광권님
이렇게 다섯 명이 함께 회를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회 먹으러 가기 전 글을 써야 해서
배고플까 봐 조금만 먹으려던 것이
결국 배가 든든하게 부를 만큼 먹어버렸다.




저녁을 먹은 뒤 잠깐 게으름을 피울 시간도 없이
1시간 동안 브런치에 올릴 글을 후루룩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나에게 일기 같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내가 눈으로 본 장면들을 고스란히 기록해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귀찮지 않냐고,
부지런하고 대단하다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나는 브런치라는 나와의 약속이 있어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이 담으려고 하고,
조금 더 다양한 것을 느끼려고 한다.





내가 글을 써야 해서 먼저 출발하라고 했더니
연주와 동기가 같이 걸어가자며 기다려주었고,
정범 오빠와 광권님은 먼저 가서 먹고 계셨다.

우리가 도착하니 왜 이렇게 늦었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건네셨다.

늦은 이유가 나 때문이라 미안하다는 인사를 몇 번 하고







빠질 수 없는 짠도 곁들였다.

제주도에 온 지 벌써 5일째.
다들 숙소에서 제주에 온 기분을 내보겠다며
홍마트에서 부지런히 회를 사와 자주 먹은 듯했지만,
저녁을 먹고 나면 배가 고픈 적이 없었던 나는
몇 번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해왔고

오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회를 먹게 되었다.

사실 처음 가려던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제주 버킷 근처의 횟집들은 대부분 일찍 문을 닫았고, 여러 곳에 전화를 돌리다.
늦게까지 하는 이곳을 알게 되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오늘의 선택 중 단연 최고였다.




사장님께서 사진 찍어도 된다고 해서 올립니다... (하트)


그 이유는 사장님께서 색소폰 연주를 해주셨기 때문.


늦은 시간에 방문한 터라
우리 테이블과 신혼부부 두 팀만 남아 있었는데,
사장님은 “연주 한 곡 해드릴까요?” 하고 물으시더니

정말 멋드러지게 색소폰을 연주해주셨다.


첫 곡은 임창정의 ‘소주 한 잔’.
우리 테이블은 9x년대생들로 모여 있었고,
그래서인지 선곡이 하나같이 익숙했다.

이어서 흰수염고래, 네버엔딩 스토리 등
모두가 알고 있는 노래들이 흘러나왔고,
공감과 추억이 한꺼번에 올라와
감성에 젖어 술을 마시며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제주에 로망이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운동도 하며 친해지는 것들.


하지만 홀로 여행을 왔다면
그 로망들을 온전히 실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함께 프로그램을 듣고,
운동을 하고,
2주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부지런히 서로를 알고,
각자가 가진 매력을 천천히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그런 과정이 아니었다면
오늘과 같은 밤은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미치자
괜시리 마음이 벅차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조금은 취했었던 모양이다.)




사장님께서는 연주를 해주신 대가로
우리 테이블의 소주 몇 잔을 받아 드셨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합석이 이루어져
신혼부부 테이블과 사장님까지 모두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취기가 오르자 우리는 묘하게 들떠 있었고,
들뜬 만큼 술잔을 기울이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만큼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보기 어려웠을 서로의 모습들을
그 자리에서 분명히 보고 있었다.




함께 마신 술병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술잔을 함께 기울였을 뿐인데
전주에 산다는 신혼부부와도 금세 친해져
언니와는 맞팔까지 하게 되었다.


언니는 얼굴이 어려 보여서 나보다 동생일 줄 알았는데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였다.

내가 오빠에게 언니한테 잘하라며,
언니가 예쁘고 성격이 좋아 부럽다고 너스레를 떨자
오빠는 그건 자기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니 걱정 말라며
덩달아 너스레를 떨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렇게 깊이, 빠르게 친해지다니.
술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우리는 내일 술이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씩 멀어져 있을 테지만
오늘 밤만큼은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굴었다.


그게, 돌아오지 않을 ‘제주도에 대한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웃기면서도 즐거웠다.





갑작스럽게 깊이 친해져서
‘황금물고기’ 앞에서 만세까지 하고 찍은 사진 ㅎㅎ


제주도에 오면 꼭 동생과 한 번 들리겠다고 말씀드렸고,
사장님께서는 우리를 잊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흰 종이와 펜을 가져와
이름과 사인을 남겨두라고 하셨다.


우리는 각자의 이름을 예쁘게 남기고는
아쉬운 마음이 묻어나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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