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radbury Aug 06. 2024

불구경

“너희는 화장 같은 거 안 해도 예뻐.”

  불이다. 분명 타고 있지만 재는 날리지 않는 가을 불이다. 오히려 청명하여 가시거리가 먼 날, 차갑게 이글거리는 불이다. 굽은 길 따라 옮겨붙은 불길은 심지서부터 푸르다가 노랗다가 빨개진다. 

  그 길 한쪽에 어색하게 여문 열 쌍의 아이들이 두 줄로 서 있다. 중학생 때의 떫은맛은 사라지고, 이젠 제법 성인(成人)의 날리는 머리카락 끝에 닿아있다. 그저 크기와 부피만 키우던 뜨거운 여름하고는 사뭇 다르다. 여물어 간다. 옅은 살구색 파우더로 가린 이마마다 붉게 익은 잔 열매들이 옹송그리며 모여있다. 서로의 팔목과 가슴에 꽃을 달아주는 표정엔 단풍 빛이 번져간다. 여자 파트너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남자아이들의 손이 밤잠 자는 사랑초처럼 오므라든다. 그 주위에서 예닐곱 대의 카메라가 이 풍경을 담아내느라 바쁘게 셔터 소리를 낸다. 아이들의 부모들이다. 첫 홈커밍 파티여서인지 부모들도 설레긴 마찬가지다.  

  “너희는 화장 같은 거 안 해도 예뻐.” 

 이마에 꿀밤을 먹이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때.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재잘대며 걸어가는 내가 보인다. 어른 흉내 내며 몰래 한 눈 화장이 참 어색하기만 하다. 말도 안 되는 연애소설을 써 돌리며 친구들을 대리만족시키던 나의 익어가는 볼이 그 계절의 색과 닮았다. 그렇게 한 시절을 태운 바람 한 자락이 날리자, 빨갛게 타다 만 가을 하나가 바스락거리며 남색 치마를 스친다. 

  우편물을 가지러 나온 노부부도 이 아름다운 불구경에 합세한다. 당신들의 때를 기억하냐 물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타올랐던 한 시절을 회상하며 황홀경에 빠진다. 한 시간 넘게 공들인 머리는 남학생의 설레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간 그녀의 집 앞. 그리고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오던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잠깐, 그랬던가? 아름다웠던가? 가물거리는 기억은 원래 그 몸체를 더욱 아름답게 포장하는 법이다. 그들 역시 오십 년 전엔 저렇게 길과 함께 익어가고 있었을까. 집으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구두 코에 다 타 버린 가을들이 버석버석 발길을 잡는다. 

  너무 뜨겁게 자신을 불태워 이제는 다 말라버린 것들이 마지막 인사로 손을 흔들며 바닥으로 추락한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아직 젊음에 살랑대는 손끝이라도 잡고 싶은 건지 아이들의 발끝에, 어깨 위에, 머리카락에 내려앉는다. 그래서 아이들의 턱시도와 드레스에 불꽃 같은 손바닥 무늬를 남겨 자신도 함께 카메라에 담긴다. 

  이제는 부엽토로 남아 아이들에게 영양분을 대야 할 때다. 그것이 지나가는 세대가 할 몫이라는 걸 길가에 열 맞춰 서 있는 현자들이 온몸을 털어 본을 보인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오래 그곳에 남아 백 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그 숭고한 열기에 아름답게 익어가는 아이들을 내려다볼 것이다. 

  노을이 찾아오는 시간. 차가운 바람에 더 뜨겁게 온몸을 사르는 가을 길을 따라 점점 사라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참 좋다. 단풍에 데어 죽겠다.

작가의 이전글 검은색 위에 빨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