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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지 Jun 07. 2024

나는 엄마가 너무 힘들어(1)

엄마의 딸로 버텨내기

결혼 한지 이제 일 년.


결혼 전, 엄마와 늘 함께 했다.

일상생활은 물론 사소한 것들까지 공유했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한 뒤로 우울증에 시달리셨다.


아픈 엄마를 헤아릴 틈 없이,

결혼직전 알게 된 남편의 거짓말과 빚으로 난 지쳐있었다.

매일같이 엄마와 전화를 하던 횟수는 어느덧 줄어가고,

본가의 방문도 점차 줄어져 갔다.

결혼 후 가족은 물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의 부름으로 본가에 방문한 날이었다.


"엄마, 나왔어"


"너는 내가 불러야 오니?"


"바쁘기도 하고, 뭐 그냥 그렇지..."


"너 같이 싸가지 없는 딸이 없어..."

(진심이 아닌 장난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에겐 작은 상처가 또 쌓인다.)

"우리 딸, 반찬 줄려고 반찬 좀 했지. 김서방 좋아하는 오이소박이도 가져가"


"엄마 힘들게 뭐 하러 만들어. 이거 용돈, 내가 급하게 오느라 그냥 왔네"


"너 같이 싸가지 있는 딸이 세상에 없어!"

(진심으로 칭찬이다.)


"나 갈게"


"너는 오면 금방 가냐?"


"또 올게, 나 간다."


엄마의 업 앤 다운의 텐션을 맞추며 10분 만에 본가를 급히 나왔다.






엄마는 부잣집 막내딸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셨다.

어려움 없이 살아온 엄마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오셨다.

엄마의 인생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순간에 모든 게 변했다.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내가 엄마 뱃속에 있었다.

20대 중반에 아무도 없는 서울로 시집온 엄마는 결혼 후 모든 게 거짓말인걸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사기결혼이었다.






엄마의 삶을 보며 나는 늦게 결혼하면 잘 살 줄 알았다.

'엄마처럼 안 살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내 현실과 다른 게 뭐지?

참으로 씁쓸하다.

소름 끼치도록 분하고 억울하다.


‘딸이 엄마 팔자 닮는다.’

진짜로, 이 말이 맞을까?


그렇게 고통과 눈물로 십여 년을 버티다,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힘들게 이혼소송까지 가게 되어 엄마는 사기결혼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는 어린 나를 붙잡고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하며 말씀하셨다.

막 20살이 된 나는 엄마도 지켜야 했고, 어린 동생도 지켜야 했다.


엄마는 일을 해본 적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시, 찜질방 내에 있는 매점을 보증금만 주면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한참 찜질방이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여서 장사는 곧잘 되었다.

24시간을 운영을 해야 하는 탓에,

오전부터 저녁까지는 엄마가 근무를 하고

난 학교수업이 끝나면 바로 가서 야간부터 새벽까지 근무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건비를 줄여야 했고, 엄마 혼자 일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난 21살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20대 나의 가장 밝고 젊은 청춘은 매일 늦은 밤,

지하 찜질방과 함께 나의 20대도 지나가고 있었다.

부자가 되고 싶었다. 성공하고 싶었다. 돈걱정 없이 살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참고 견디면서 살 수 있었다.


생활은 안정되어 엄마는 더 큰 규모의 찜질방에 투자를 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자한 찜질방이 경매로 넘어가며

엄마는 부도를 맞았다.

모든 걸 잃은 엄마는 절망할 겨를도 없이 수도권 변두리에 있는 찜질방 매점일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엄마와 함께였다.

다른 친구들처럼 여행도 가고 싶고, 맘껏 쉬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사치였다.

몇 년이 지나 장사도 안정화가 되어, 나는 원하는 직장에 취업을 했다.

처음 맛보는 자유였다.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 행복했다.


그 자유도 잠시, 2년도 채 되지 않아 엄마는 나를 찾으셨다.

같이 사업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계속 일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두 번이나 붙잡는 대표님의 부탁에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엄마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렇게 또다시 10년을 엄마와 함께 했다.

이번엔 내가 대표가 되어 모든 걸 진행해야 했다.

매일매일이 부담이었다.

불면증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했다.

영양불균형으로 머리가 끊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었다.



엄마는 일 뿐만 아니라 내 삶도 통제를 하셨다.

일을 마무리하면 10시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12시라는 통금시간이 있었다.

당시 난 30살이었다.

'딸이니깐.. 세상이 요즘 너무 흉흉하니깐...'

이해할 수 있었다.


늦게 배운 술맛에 퇴근 후 술자리 약속은 점점 많아지고

귀가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때마다 엄마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사업을 시작하고, 엄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 자연스럽게 엄마와 맥주 한두 잔씩 마시는 게 습관이 되었고

어느덧 우리는 술친구가 되어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오늘 일하면서 힘든 얘기,

과거에 있었던 일등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웃고 울곤 했다.


술을 마시다 취기가 오를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내가 과거에 힘들었던 일들을 꺼내 기억을 상기시켰다.


"엄마.. 그만해"


"그때 일 생각하면 네가 불쌍하고 힘들어서 그래"


"엄마! 가장 힘든 건 나야, 당사자인 나라고..

나도 가만히 있는데 왜 얘기를 꺼내서 생각나게 해?"


"생각하면 속상하니깐"


"그만 말해"


항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다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날들이 많아졌다.


엄마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 밖에서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몰아세웠다.


"지금이 몇 시니?"


"아직 12시 전이잖아"


"내일 출근 안 하니? 일찍 일찍 다녀"


"아, 그만 좀 해. 나 매장 마감하고 2시간도 안 먹고 들어온 거야!"


"네가 제정신이니?"


'뭐? 제정신? 무슨 말을..."


엄마는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밖에서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왔다.

엄마가 너무 미웠다.

12시가 지나자 핸드폰에서 미친 듯이 진동이 울려댔다.

받지 않았다.

1시가 넘어서 도둑고양이 마냥 집에 살그머니 들어갔다.

엄마는 거실에 계셨다.


'아.. 젠장'


모른 척하고 재빠르게 내방으로 들어갈라고 하는 찰나

엄마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대신다.


(엄마는 술이 취하신 것 같았다.)


"너, 도대체 요즘 왜 그러는데?"


"내가 뭘.."


"다 큰 계집애가 일찍 일찍 다녀야지"


"나도 일 좀 끝나고 놀자, 그리고 내가 퇴근이 늦어서 그런 거지, 늦은 게 아니야"

"20대에 못 논 거 이제 좀 놀겠다는데 도대체 왜 그래,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요즘 네가 하는 행동들 다 맘에 안 들어"


"그럼 어떻게 해야 맘에 드는데?"

"뭐, 엄마 말만 듣고 엄마 하라는 대로 하고 살아야 해?"


"어, 넌 내가 하라는 대로 해"


"20살 때부터 그렇게 살았잖아, 살아줬잖아, 그니깐 이제 그만해!"


"누가 그러래? 해달라고 했어? 그래서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래서 니 멋대로 살고 있잖아, 이게 잘하는 거니?"


"난 엄마 인형이 아니야!"


"아니, 넌 내 꼭두각시야"


"하...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엄마가 술이 취했다지만 이성을 잃을 사람은 아닌데...

엄마랑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며 수도 없이 싸웠지만 오늘은 다르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붙잡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잠에서 깨진 아버지가 엄마를 모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엄마를 위해 살아온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화가 났다.


갖가지 짐과 여권, 비상금을 챙겨 난 그대로 집을 나왔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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