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그냥 놔두세요
26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1년 정도 지났을 쯤 술을 처음 마셨다.
엄마와 함께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나에게도 막중한 책임감이 따랐다.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목돈을 투자한 만큼 기대감도 두려움도 컸다.
처음 1년은 좋았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위기와 매출악화로 빚이 생기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모태신앙이었던 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고,
술은 금기기호식품으로 여겼다.
‘힘든 일은 한 번에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와의 이별, 갑작스러운 이사, 사업자금난의 압박으로
당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해보고, 좋은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우연히 맥주도 한잔 마셔봤다.
차갑기만 한 쓴 술이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날, 나는 몇 달 만에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술과 함께 인생의 쓴 맛을 알았다고 해야 하나?
나에겐 아직 쓰디쓴 맥주를 퇴근 후에 한두 잔씩 마시고 자는 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렸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처럼 술을 마시는 횟수가 빈번해지더니
지금은 매일같이 마시는 게 일상이 되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퇴근 후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 이렇게 맛있고, 어떤 날은 달달하기까지 했다.
하루종일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치이고, 나 자신에게 치이는 날은 더더욱이 술을 찾았다.
나 좀 위로해 달라고, 나 힘들었다고...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술과 함께 했다.
밥 먹는 날 보다 술 먹는 날이 더 많았고,
영양불균형으로 애지중지 길러왔던 긴 생머리는 끊겨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술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알코올중독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술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야'
'단지 퇴근 후에 힘든 나를 달래주는 친구를 만나는 것뿐이야’ 라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남들과 어울려 지내고,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술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다.
하지만 술은 수단의 한 방법일 뿐, 많은 스트레스, 고민들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안다.
최근엔 임신과 출산에 대한 주변 압박과 피로감은 하루가 다르게 느껴진다.
술을 끊어볼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적도 있다.
남들이 말하는 삶을 따라 미라클모닝, 100일 도전 등을 통해 '100일 금주'를 도전했었다.
하필이면 여름에 시작해, 지금 생각만 하면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100일 금주를 통해 경험하고 느끼는 점은 많았다.
개인적인 시간도 많아지고, 삶의 여유도 생기며,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되는 걸 보며 유익했다
그렇다면 술은 안 마시는 게 잘 사는 삶인가?
아니면,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술은 가끔 마시는 게 오히려 더 나은가?
나처럼 퇴근 후 맥주 한잔이 하루의 기쁨이라면?
매일 같이 마시는 맥주 한두 잔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최고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술과 함께 아픔, 기쁨, 행복, 그리고 추억을 기억했다.
오늘을 리셋하고 다음날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아프다.
10대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부모님의 싸움과 파산, 소송과 이혼
20대는 내가 원한 초록색 대신, 온통 회색으로 뒤 덮였던 어두컴컴한 삶들과 함께
30대를 맞이했다.
30대에는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다.
그건 착각이었다.
또 절망과 좌절 속에 30대를 보냈다.
사업을 정리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었다.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집도, 직업도, 돈도, 남자도 아무것도 없어.'
'난 망한 인생이야. 이제 다 끝났어.'
'지금까지도 열심히 살았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많은 시간, 절망 속에 허덕여 살았다.
어느 날 멍하니 TV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얼마뒤면 나도 40살이 되는데'
또다시 이런 삶을 살 수 없었다.
아니, 살기 싫었다.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찾아봤다.
마흔이 된 나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다시 열심히' 살아온 지 4년 정도 되었다.
이제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주 조금씩 깨닫는다.
40살이 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잘 살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독립을 하고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다시 한번 내 삶은 무너졌다.
‘도대체,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저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요?
'40년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요. 근데 왜 저한테 이런 아픔과 고통을 주시나요?’
3년 넘게 유지되던 내 라이프패턴은 조금씩 무너져가고,
집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맥주캔이 쌓이기 시작했다.
매일 마시는 술의 양과, 나의 불안의 양은 점점 비례해져 갔다.
새벽마다 명상으로 시작하고, 긍정확언을 외쳐대던 나는 불만으로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다.
다시 불안해졌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싫어, 이제 열심히 살기 싫어. 도대체,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데?
애써봤자, 다시 제자리걸음인데..
아니, 더 바닥으로 나를 몰아넣는데? 나는 이제 끝났어...’
도망가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고 싶다.
그냥 살면 안 될까?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고민이 있을까?
웃음을 지으며 행복한 모습을 한 사람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낀다.
나도... 웃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결국, 스스로 병원을 찾아간다. 살아보려고..
'다시' 잘 살고 싶어서...
매주 상담받는 병원에서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나에게 조심스레 말씀하신다.
"지현 씨, 지난주는 술 좀 줄여봤어요?"
"아.. 니요.."
"근데요, 제가요 많이 안 마셔요. 맥주 한 두 캔...."
"지현 씨, 중요한 건 매일 드시잖아요?"
".... 네"
"지현 씨, 1주일만 안 마셔 볼 수 있겠어요?"
".... 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걸 난 예감하고 있었다.
선생님을 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1주일분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잘 살아낸 나 자신을 위로하며
아니, 스스로와 타협하며
맥주 한잔과 하루를 마무리한다.
난, 오늘도 나를 이기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