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딸로 버텨내기
(띠리리리링)
전화음이 울린다.
"어, 경숙 씨.. 나? 이번에 딸이랑 외국 나갔다 왔지"
"우린 여행 자주 다녀, 그러~엄 걘 딸이 아니고 친구야 친구"
"다음 달엔 부산에 다녀오려고, 이번에 새로 생긴 아난티로 호캉스 하러 가"
"운전은 우리 딸이 다하지, 부럽긴 뭘"
언제부터였을까.
엄마와 하는 것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5성급 호텔이 딱 나하고 맞아, 완전 내 스타일이야"
"웬만한 해외 나가는 것보다 호캉스가 적성에 맞는 거 같아"
5성급이 본인취향 인걸 강력히 내세우는 엄마 앞에
난 또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최고급 호텔을 찾아본다.
일찌감치 독립을 한 동생은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고,
결혼 후에도 와이프와 자유롭게 여행을 즐겼다.
나에겐 휴가란 곧 부모님과의 여행이었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나도 친구들이랑, 남자친구와도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일상생활도 조금씩 통제해 오던 엄마는
서른 살이 훌쩍 넘어가는 딸에겐 작은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으셨다.
짐을 챙기는 걸 눈치챈 엄마는 분이 안 풀리셨는지,
취한 술기운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내 속을 후벼 파는 말을 하셨다.
"니 거 아닌 건 다두고가"
"차키도 두고가"
"이 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
악을 쓰며 소리치는 엄마를 뒤로한 채
작은 트렁크 하나와, 비상금, 여권을 들고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지?'
'참, 나 한심하다. 갈 데도 없네'
'내일 물건 출고 할거 있는데, 아 씨..'
'넌 이 상황에서도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면 어떡하라고'
'이지현! 지금 속상하고 눈물이 나고 울어야 해'
'한심한 년'
두어 시간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뜬눈으로 보냈다.
날이 밝아질 때까지 기다리다 첫 버스를 타고 매장으로 향했다.
당장 다음 주까지 해결해야 하는 급한일들을 처리했다.
'난 다시 여기 안 올 거야'
'그래도 이건 고객과의 약속이니깐, 내가 마무리만 하는 거야'
'아, 고생을 사서 하네, 하.. 힘들어'
부리나케 매장에서 나와 목적지 없는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탄 뒤,
역시나 목적 없이 바로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지?'
'뉴욕 가서 다시 살까?'
'아님, 하와이? 힐링을 하고 올까?'
(아주 잠깐 행복한 상상을 한채, 가방 속 비상금 봉투와 통장잔고를 확인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공항의자에 앉아 멍하게 있었다.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로 예약했다.
그렇게 보름정도 제주도에 머물렀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에게만 거취를 알렸다.
부모님한테 전달한 듯 가족에게선 연락은 더 이상 없었고,
난 서울로 돌아와 오피스텔을 바로 계약했다.
엄마는 당시 일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신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일이 돼버렸다.
이렇게 엄마랑 크게 싸운 건 두 번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는 해에 난 미국으로 도망을 갔었다.
다시는 안 돌아오겠다는 마음으로 단단히 준비를 했지만,
엄마의 의절에 의한 협박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4년이 지났다.
그 사이 엄만 점점 더 나를 통제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제와 관심은 결국 폭탄이 되어 터져 버린 것이다.
제주도에서 올라와 홧김에 계약한 오피스텔은 원룸이었다.
급하게 구한 원룸은 썩 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사무실 용도로만 쓰다가 3개월 월세와 시간만 날린 채,
다시 본가로 복귀했다.
본가로 복귀한 후, 엄마와 함께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치료과정 중에서 엄마는 나를 가장이자, 남편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통제하고, 본인 뜻대로 안 되면 화가 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마도 갑자기 엄마가 되고 이혼을 하며,
불안했던 마음들을 풀 곳 하나 없이 딸에게 무작정 의지를 했고,
그 걸 내가 오롯이 다 받아줬던 것이다.
치료선생님은 각자 분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치료 이후, 엄마가 애쓰며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이셨다.
나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모습들과, 나의 삶을 통제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서로에게 이미 너무 많이 길들여졌다고 해야 할까?
엄마가 힘들지만, 엄마가 미웠지만, 엄마를 외면할 수 없었고
엄마 역시 가장 힘들 때 나를 가장 먼저 찾으셨다.
그날 이후 엄마와 난,
보이지 않는 아주 얇은 선을 두고
서로를 의식하며 배려하고
또 그렇게 조금씩 맞춰가고 있다.
최근 엄마의 통화 속 목소리는 늘 섭섭함과 반가움이 묻어 나온다.
가끔 보는 엄마는 반가움의 표시로 나에게 다소 거친 표현과 장난을 치신다.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미안해진다.
'지금은 엄마를 바라봐 줄 여유가 없어'
'엄마, 아직도 나 너무 힘들어'
'그냥, 티 안내는 것뿐이야...'
'매일 울 수는 없으니깐'
'나도 살아야 하니깐'
엄마한테 힘들다는 말을 할 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이 느껴졌는지
자연스레 만남도, 통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최근에 처음으로 1달이 넘도록 엄마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서로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연락을 하지 않는 기간 동안 난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엄마 전화가 나한테는 부담이었나?'
'내가 마음이 힘들고 불편하니깐 연락도, 만남도 다 싫었던 거야?'
'결국 엄마가 잘 못한 게 아니라, 내가 문제였어'
'그러면서 엄마 탓만 했어'
'나의 20대 돌려달라고만 했어'
'엄마한테 잘해주고 싶은데, 내가 지금 상황이 되지 않으니 엄마가 불편했던 거야'
'아... 그래서 지금까지 내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구나'
'나는 한 번도 나를 돌보지 않았어...'
지금까지 모든 게 '엄마 때문'인 줄 알고 살았었는데, 아니었다.
모든 건 다 나로부터 시작이었다.
나를 아껴주지 못했고, 나를 위로해 주지 못했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었다.
그러면서 남을 먼저 아끼는 척, 위로하는 척, 사랑해 주는 척 사느라 힘들지 않았을까?
최근엔 글을 쓸 때마다 늘 아파오는 가슴 통증과
내 글의 성장통을 느끼며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
'엄마, 나 조금만 더 기다려줘, 병원도 열심히 다니고 돈도 많이 벌 거야'
'그니깐, 내 마음이 좀 더 회복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은데, 다시는 열심히 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시 한번 용기 내볼게'
'세상밖으로 더 나오는 연습 할게'
'그러니깐... 나 미워하지 말고, 딸 원망하지 말고 조금만 나에게 시간을 줘'
나에게 엄마이자, 부모이자, 가족이자, 하나뿐인 나의 술친구...
우리 엄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