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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 Jun 27. 2021

구슬 왕자 3

소녀


열일곱이 될 때까지도 기연의 꿈에는 이따금 구슬 왕자가 등장했다. 어릴 적 스치듯 본 그림이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른다니 별스러운 일이었다. 물기 어린 눈두덩이. 열매처럼 망토에 매달려 있던 구슬들. 구슬의 색깔들과 그 안의 무늬들. 깊은 잠에 빠진 아이는 기연의 꿈속에서도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


잠결에 기연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선심이라도 쓰듯 영롱한 구슬들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어두운 미술관의 벽을 오묘한 반점들로 물들였다. 꿈속에서 미술관은 언제나 한 밤 중이었으며, 복도에는 그림과 기연 둘 뿐이었다. 환희와 슬픔 그 중간쯤 되는 감정에 잠길 때 즘엔 어김없이 날카로운 윤곽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기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그녀의 가족은 수도권으로 집을 옮겼다. 낯선 환경과 웬만해선 먼저 말을 걸지 않은 기질 탓에 혼자서 조용히 창 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언제나 적응에 느린 편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차츰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겨나자 그제야 자신과 비슷하게 하늘에 시선을 두는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수오.’


교복 명찰에 수 놓인 짧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기연은 그의 명찰 양 쪽으로 넉넉한 여백이 마음에 들었다. 그 여백만큼이나 술렁술렁했던 남자아이는 학급을 겉도는가 싶다가도 어느 틈엔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오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편두통과 귀를 찌르는 매미 소리가 들려와 기연은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봄이었다. 먼 훗날에서야 그것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어느 여름날의 잔상이라는 걸 알았다.


기연은 왜소하며 조용한 편이었고, 핏기가 없었다. 자주 편두통에 시달려 엎드려 있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수오는 친구들에게 쫓길 때마다 혈색 좋고 듬직한 친구들을 놔두고서 늘 그녀의 뒤로 와 숨었다.


"다른 애들 뒤로 숨지 않고…."


소심하게 말해보아도 소용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딱히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따듯한 손이 어깨에 닿을 때나 낮은 목소리로 ‘나 좀 숨겨줘’하고 속삭일 때면 기연의 가슴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두근거렸다. 누군가 자신을 강한 존재라고 믿어준다는 사실이 그녀를 설레게 한 것이다. 어쩌다 옥상의 환풍구 앞에 함께 앉아 있게 된 점심시간. 기연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수오에게 물었다.


“너는 왜 맨날 쫓겨다녀?”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자신의 뒤로 숨는 이유가 뭐였는물으려 했지만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건 착각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수오는 대답 없이 숯 많은 머리칼을 긁적이며 보일 듯 말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의 소탈한 미소에 기연은 처음 느껴보는 따듯한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누군가를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니. 그에게 호감이 가면서도 동시에 질투가 났다. 그렇 둘은 스물여섯이 넘도록 여러 건물의 환풍구 앞에서 나란히 도란거리는 사이가 되었다. 대학교, 동아리 건물, 각자의 직자 건물 옥상에서…. 이따금 외벽에 달린 환풍구의 바람소리를 배경으로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높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건 두 사람의 몇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였다.


기연은 성장했다. 몽상에 잠기거나 어지러움에 시달리던 유년기를 거치고 적당히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일상에서도 나름의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여러 사람과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진 사람과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했다. 새로운 가족을 얻기도 했고, 사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앓던 알레르기가 사라지고 다른 알레르기를 얻었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듣던 음악의 장르가 바뀌었다. 좋아하는 요리와 장소를 싫어하게 되었고, 수년이 흘러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지나치게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어른이 되었다.


많은 것이 변하는 중에도 그녀의 깊고 맑은 흑갈색 눈동자, 무슨 이야기든 귀 기울여 주는 친구 수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느껴지는 쫓기는 듯한 기분은 변함이 없었다. 운명이라고 말하기엔 성급하고 죽음이라 부르기엔 단순하지 않은 어떤 만남을 언제나 목전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얘기를 털어놓으면 수오는 기연의 눈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그러면 기연은 자신의 눈가가 포근하고 가벼운 물체에, 이를테면 깃털 같은 것에 감싸이는 기분이 들면서 마이 차분해졌다.


난간에 걸친 수오의 팔뚝에 살갗이 닿은 날에는 평소와 다른 꿈을 꾸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아름다운 풍경들, 계곡, 평원, 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노을을 보고 들판의 풀내음을 맡으며 깊은 평안을 얻었다. 눈물로 깨어나는 날 줄어들었다. 참으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건 마치 어느 새의 꿈을 대신 꾸기나 하는 것 같았다.


기연은 수오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를 알게 된 후부터 내 삶에 드리웠던 어두운 장막이 엷어진 것 같다고. 이런 말을 하면 그는 ‘에이, 엉뚱한 소리'하며 싱겁게 웃을 게 뻔했다. 그가 웃는 상상에 덩달아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기연은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덜컥 받고 말았다.


"네, 여보세요?"


"… 기연아."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목소리. 함미술관을 찾은 날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던 소꿉친구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기연보다 먼저 고향을 떠나 멀찍이 떨어진 다른 도시에 정착했다. 수많은 기억의 더미를 뒤지다가 유년시절 친구의 이름을 떠올린 기연이 반가움을 담아 외쳤다.


"윤아니? 이게 얼마만이야."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 눈을 떴다?"


눈을 떴다, 하고 전화가 끊겼다. 윤아가 아니었나? 기분이 이상해진 기연은 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한참이나 샤워를 해봤지만 불편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잠에 들려할 때 비로소 명확해졌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의 어릴 적 친구가 분명했다. 주어는 빠져 있었지만 무엇이 눈을 떴다는 건지도 짐작이 되었다. 한때 기연의 꿈을 지배했던 깊은 잠에 든 소년. 윤아도 그의 꿈을 꿔 온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더 오래 그 악몽에 시달려온 걸지도.


며칠 뒤. 직장 동료들과 찾은 식당에서 그녀는 고향의 호숫가 미술관이 화재로 붕괴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윤아 갔던 미술관….”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고미술품들이 소실된 안타까운 현실을 기자는 흥분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기연은 안개에 덮여 있던 그날의 조각들이 이제 와서 다시 선명해지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녀는 데스크톱의 모니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 창에 ‘구슬 왕자’ 입력했다.


화가 모리치의 그림.


이번엔 '모리치'를 입력한다.


구슬 왕자를 그린 폴란드의 화가(1880년경~?)


기연은 손톱을 깨물었다. 그림과 화가는 한 줄짜리 정의로 서로가 단단히 묶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그녀는 전소된 전시관의 도록을 찾아보았지만 인터넷 검색 결과 이상의 정보는 발견할 수없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 기연은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시립도서관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정보를 종종 책에서 발견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고서들을 뒤지다 보면 무언가 나올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중세 미술, 명화…. 도서 검색대에 입력할 단어들을 고민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 언덕을 오르다가 기연은 그만 더위를 먹고 말았다. 두통이 도지면서 눈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머리가 아플 때면 따라오는 증상이었다. 가로수에 매달린 매미의 울음소리가 한층 높아져 귀를 찢을 듯이 울려왔다.


건물 안에 들어선 그녀는 현기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대한 느리게 움직이면서 중유럽 미술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얀 마테히코, 요제프 메호페르, 율리안 파와트…. 비슷한 활동 시기의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를 발견했지만, 모리치의 이름도 그 유명한 그림도 기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먼 나라로 건너올 만큼 유명한 그림의 작가인데 이렇게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나마 남아있던 구름이 걷히고 여름 햇살이 그녀가 앉은자리까지 뻗쳐왔다. 한때는 따듯한 빛을 너무도 좋아해서 여름에도 창가를 선호하는 그녀였다. 그러나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빛은 고문 도구나 다름없었다. 기연은 들춰보던 책을 내려놓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서늘 해더니 아른거리던 햇살이 사라졌다. 매미 울음소리가 돌연 그치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비가 오려는가.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소나기라도 내리면 어쩌지. 기연이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았다.


구슬 왕자.


액자를 닮은 창틀 너머에 그가 서 있었다. 기연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보았지만 조금도 낯설지 않은 저 얼굴. 새하얀 피부와 그보다 더 새하얀 눈. 동공이 보이지 않는 그 커다란 눈망울에서 투명한 기름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덩어리들은 기연을 똑바로 응시한 채 버드나무 두 그루 사이에 둥 떠있었다. 소년의 모습은 아름답고 슬픈 대리석 동상 같았다. 구름과 공기, 지나가던 이름 모를 새들과 매미, 심지어 나뭇잎까지 모두 얼어붙어 있는데 오색 구슬이 달린 그 망토만이 물리의 원칙을 무시한 채 살랑거리고 있었다. 유리알이 반사해낸 동그란 빛의 유영은 마치 요정의 군무 같았다. 경배의 춤사위라기보다 두려움에서 오는 숭배의 몸짓에 가까운 군무.


갑자기 바늘로 눈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기연이 얼굴을 숙였다. 고통이 가실쯤 왕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무지개 빛의 잔상만이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기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잔상은 사라지고 왕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깔의 구슬이 홀로 기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묘하며 신비로운 소용돌이가 유리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자유... 로워져.’


막 인간의 언어를 배운 듯한 구슬이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자유롭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기연이 이렇게 자문하며 조용한 아우성을 물리치자 이번에 구슬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한결 유창하고 애처로운 음색으로 간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그녀의 내면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격한 감정들이 몰아치더니 그녀를 흐느끼게 만들었다. 기연은 저도 모르게 '내가 살려줄게'하고 외치고 있었다. 이 생명은 오로지 기연의 손이 닿음으로써만 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녀가 구슬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튕겨낼 빛을 잃은 구슬은 부르짖음을 뚝 멈추었다. 기연이 고개를 들었다. 흐릿하던 검은 그림자는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가더니 커다란 새의 실루엣으로 바뀌었다. 가지 위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기연의 구슬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아이를 빼앗은 괴물…. 내 연인과 가족들을 죽인 살인자! 온갖 종류의 기시감 어린 분노가 내면에서 격렬히 솟구쳐 올랐다. 기연은 광분하여 눈이 뒤집혔다. 저 역겨운 새의 깃털을 모조리 뽑아내고 부리를 산산조각 내리라!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나무 등걸을 밟고 위로 기어올랐다. 가까이 다가가면 새는 더 높은 가지로 옮겨갔다. 손톱이 부러지고 가시가 박혀 피가 흘렀지만 기연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장면을 슬픈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검은 새는 결단을 내린 듯 까만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구슬을 물고 있던 부리를 하늘로 쳐들었다.


꿀꺽.


순간 붙잡고 있던 가지가 꺾이면서 기연은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가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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